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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5. 2016

‘자신의 언어’가 없는 아이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3)

1     


아이들은 대체로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싫어한다. 첫 문장을 내놓는데 1시간을 훌쩍 넘기는 아이도 있다. 하기 싫어 안 하고, 장난 치며 딴짓하다 못한다. 실제로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서, 힘들어서 그럴 때가 많다.

길거나 짧은 활동지 줄칸이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넓고 막막하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분명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 글을 쓰는 것보다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하고 성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글 쓰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부탁한다.

모든 칸을 빽빽하게 쓸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한 문장, 단 한 개의 단어라도 진솔하게 쓰는 게 훨씬 가치가 있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면 문장들이 나온다. 늘 예외가 있지만 대다수가 그렇다.


지난 2학기 개학 초, 성찰과 다짐과 계획으로 새 학기를 맞이해 보자며 글쓰기 수업을 했다. 2학년 다섯 개 반 중에 우리 반이 제일 먼저 끝났다. 피드백 삼아 활동지에 감상평을 한두 문장씩 써 주었다.     


“공부, 돈, 행복, 성적, 봉사활동, 책 읽기, 우정, 계획적으로 살기, 운동하기, 저금, 가족 화목, 인내심, 효율, 자신감, 열정, 나 자신을 사랑하기, 희망을 가지고 행동하기, 배려, 즐거움, 사람, 건강, 자전거 사기, 효도하기, 티브이 보는 시간 줄이기, 체중 줄이기, 돈 모아 옷 사기”     


우리 반 아이들 활동지에 적힌 열쇳말들이다. ‘공부’부터 ‘운동’까지는 두 명 이상의 아이들이 복수로 써놓은 것들이다. 다양한 다짐과 계획만큼이나 이유도 갖가지다.

아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자신들의 소박한 언어로 옮겨 놓았다. 진실함이 느껴졌다. 아래는, 소박하지만 구체성과 진솔함이 느껴져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어떤 아이의 글 중 한 대목이다.     


“나는 긴 책을 읽는 것을 실천하고 싶다. 요즘 책을 안 읽고 만화책만 읽는 것 같기 때문이다.”     


2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각자(자신)의 언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가령 글쓰기를 할 때 단 한 개의 평범한 단어, 또는 어절 몇 개로 된 짧은 문장을 쓰더라도 될 수 있으면 직접 자신의 머리에서 말들을 끄집어내라고 주문한다.

교사나 교과서의 언어는 무시해도 좋다고 말한다. 나는 믿는다. 우리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때 각자가 온전한 사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런데 몇 달 전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샤보가 쓴 책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을 읽었다. 어느 대목을 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각자의 언어론”에 관한 내 믿음이 근거가 있을까. 그 믿음이 ‘진실’하다고 해서, 가령 불완전한 사고의 주체인(주체라고 전제되는) 아이에게 “각자의 언어”를 익히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온전한 사고 주체가 되라고 요구하는(가르치는?) 일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당하다면, 그것은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


샤보가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의 말이 인상적이다. 프로이트는 1925년에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치료하기와 가르치기와 통치하기. 1927년에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무조건 불완전한 성공에 그칠 것이 확실시되는” 직업의 예를 거론했다. 샤보는 이들이 모두 인간을 상대하는 일종의 소명처럼 간주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교육, 치료, 정치적 관계는 타인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타인은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대개 거부하곤 한다. 혹은 자신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이러한 시도에 집요하게 저항한다. - 파스칼 샤보(2016), <너무 성실해서 아픈 당신을 위한 처방전>, 94쪽.     


3

    

“각자의 언어”를 들은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세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한 부류는 멍한 표정과 눈빛으로 종이를 바라본다. 다른 부류는 주저하지 않으며 상투적이고 스테레오타입 같은 언어를 쓴다. 마지막은 내 주문을 따라 “각자의 언어”로 글을 완성한다. 이들은 대략 3:6:1의 비율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자문해 본다. ‘1할’의 아이들이 쓰는 “각자의 언어”를, 나는 어떤 기준으로 무슨 권리에 의해 판별하는가. ‘6할’의 아이들이 써 놓은 스테레오타입식 문장들을 “각자의 언어” 스타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가. 그렇게 바뀌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아이들은 나의 ‘각자의 언어론’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에이, 선생님, 또 쓰기예요?” 하며 ‘저항’하는 아이들이 있다. 일정한 글 수준을 요구하거나 특정한 형식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데 말이다. 혹시 아이들은 내 ‘각자의 언어론’을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라고 여겨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칸트도 타인을 행복하게 하려는 시도는 ‘폭압 중에서도 최고의 폭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프로이트가 ‘불완전한’ 성공을 ㅡ운운한 것도 일견 이해할 만하다. 교사나 의료진, 정치가는 회의에 빠지는 순간 절체절명의 근본적 질문에 사로잡힌다. ‘대체 무슨 권리로 타인에게 진실을 강요한단 말인가?’ 그들은 심지어 이런 의문에 정녕 해답이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 파스칼 샤보(2016), 위의 책, 94~95쪽.   

  

4     


교육은 기다림이다. 샤보는 교육을 “인내의 과실”에 빗대면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번득이는 재능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는 자본에 기초하는 ‘유용한 진보’와, 따스한 온기와 불분명함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과 관련되는 ‘섬세한 진보’를 구별한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용한 진보와 섬세한 진보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 이 두 논리의 충돌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현대적 이미지가 하나 있다. 교사의 뇌 속에 들어 있는 콘텐츠를 학생의 뇌에 곧장 다운로드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건 결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해법은 결코 기술적인 데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해법’이란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문제’란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수 세대를 관통해 온 삶만이 존재할 뿐이다. 삶은 모든 휴머니즘의 재료다.” - 파스칼 샤보(2016), 위의 책, 100쪽.     


‘각자의 언어론’이든 다른 무엇이든 가르침(교육)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 거듭 회의하고, 다시 성찰하라. 아이들이 자신의 글을 100퍼센트 ‘각자의 언어’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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