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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6. 2016

“선생님 반 요새 왜 그래요?”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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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1학기 초 어느 날이었다. 교무실 테이블 주변에 선생님 몇 분과 함께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교무실 문이 열리며 한 선생님이 들어왔다.


“정 선생님, 저 수업 못하겠습니다. 가서 선생님 반 좀 보세요.”


목소리가 높았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어요?”
“가서 보시라니까요. 아이들이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난리예요. 저 수업 못하겠습니다.”


순간 화가 났다. 아이들 문제를 학급담임인 내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아니, 선생님 수업을 선생님께서 책임지셔야지 왜 담임에게 와서 이러십니까?”
“담임도 책임이 있으니까 드리는 말씀 아니에요.”
“수업 중에 일어나는 일도 담임 책임이라는 게 이해가 안 가네요. 한 번 물어 봅시다. 제가 얼마나 책임져야 하죠?”


굳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가 나 던진 힐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주저하지 않고 수치를 말했다.


“50퍼센트 정도는 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담임 책임 비율을 힘주어 강조하는 선생님 표정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작심하고 한 마디 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선생님 수업이니 선생님께서 마무리하세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차갑게 외면했다. 잠시 뒤 선생님은 하릴없이 교실로 향했다. 서운해 했을 게 분명한 곁눈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반에 가 한바탕 호통이라도 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미안했다.


학년 초라 나도 나름대로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중이었다. 힘들었다. 나와 그 선생님 모두 처음 맡은 학년 아이들이었다. 그 뒤 며칠간 마음이 무거웠다. 서로 얼굴이 마주쳐도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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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학급담임은 다양한 얼굴을 갖기를 요구받는다. 아이들 앞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와 자애로운 부모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 동학년 담임교사나 교과담임 사이에서 아이들을 지키고 옹호하는 보호자나 후견인 노릇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학교의 학급담임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오이시디(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중‧고등학교에 학급담임 제도가 있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들 나라는 대다수가 교과담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학생들은 대학에서처럼 교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한다.


이런 방식의 수업을 하고 있는 사례가 있긴 하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을 전후로 도입해 학교 현장에 적용한 교과교실제 모형 중 전면적인 교과교실제 모형(현재 ‘선진형 교과교실제’라고 불린다.)에서 이런 방식의 수업 활동을 해 오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제도는 거의 ‘완벽하게’ 실패했다. 학급담임제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학교의 ‘잠재적 교육과정’은 수직적인 위계 시스템에 따라 구성된다. 선진형 교과교실제는 본질상 수평과 분권과 자율의 원리로 운영될 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교실에 상호 모순적인 이들 두 가지 제도가 어정쩡하게 공존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스텝’이 꼬인다.


선진형 교과교실제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학급담임제 때문에 학교 현장에 쌓인 ‘적폐’가 적지 않다. 역사적 연원이 크고 깊어 학교 구성원들이 학급담임제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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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학급담임제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 준비 행정의 하나인 군사적 개념의 ‘반(班)’이 학급으로 편성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반’(班)이라는 한자가 큰 덩어리를 칼[刂]로 잘라 또 다른 왕[王]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 자체에 ‘칼을 찬 군사’ 이미지가 담겨 있다.(<한겨레 21> 2007년 9월 6일 제676호 ‘담임 없는 학교를 상상해보라’ 참조)


한자 사전에서는 ‘班’의 자원(字源)을 천자가 옥을 칼로 쪼개 제후에게 증표로 나누어 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반 시스템이 수직적이고 하향적인 위계 구조와 상의하달과 상명하복의 소통 방식을 통해 작동될 것임을 이런 자원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 학교장과 학년부장과 학급담임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위계 시스템은 연대, 중대, 소대로 하향화하는 군대 편제와 비슷하다. 이런 식이다. 군에서 연대장은 중대장에게, 중대장은 소대장에게 지시를 내린다. 교장은 학년부장에게, 학년부장은 학급담임에게 업무를 ‘전달’해 처리하도록 ‘지시’한다. 담임이 아이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솔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관리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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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관리자들은 엄격한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똑 소리 나게 휘어잡다가도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이 조곤조곤 잔소리를 해 꼼꼼히 챙기는 학급담임을 좋아한다. 예의 선생님의 ‘담임 책임 비율 50퍼센트론’이 터 잡고 있는 지점이다.


학년 초 학급담임 배정을 받은 반에 처음 들어가면 ‘학생은 교복 입은 민주주의 시민’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생활화하는 학급’이라는 문구를 담임이 강조하는 생활 지침에 넣는다. 자율과 자치에 기반한 자유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안겨주고 싶어서다.


이런 소박한(?!) 바람은 위계적인 학교 시스템 속에서 번번이 깨진다. 학교 민주주의와 학생 인권과 학생들의 자기결정권을 힘주어 외치다가도 “선생님 반 요새 왜 그래요?”라는 교장 선생님 말 한 마디에 기가 죽는다. 다른 반 선생님에게서 “요즘 선생님 반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계속 떠들어요”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주눅이 든다. 민주주의라니 웬 사치냐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구조 아래서 학급담임은 ‘슈퍼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가하게 민주주의를 말할 여유가 없다. 성적, 인성, 교우 관계, 학습 태도, 진로 탐색, 진학 준비 등등 모든 것이 학급담임의 ‘책임 사항’에 포함된다. 학급에서 예기치 못한 일(사고)이라도 터지면 바로 그 ‘예기치 못함’ 때문에 학급담임에게 ‘독박 책임’이 씌워진다.


학교 관리자들은 담임들에게 ‘문제 소지’가 있는 반 아이들과의 상담 결과나 특이 관찰 사항을 미리미리 교무수첩에 적어두라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학급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을 담임이 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학급담임제는 학교관리자들에게 최고의 ‘꽃놀이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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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발 학교혁신 바람이 불면서 학교 민주주의와 자율과 자치 역량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평교사협의회 활동을 강화하자고 한다. 교무회의를 법적 의결기구화하고, 학생회와 학부모회를 활성화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참여하는 학교 민주주의를 모두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학교 거버넌스(governence; 협치)를 말하기도 한다.


멋진 슬로건들이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현재와 같은 수직적인 위계 시스템 속의 학급담임제가 온존하는 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진정한 의미의 학교 민주주의와 자율과 자치를 경험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급담임제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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