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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24. 2016

‘킬링’이 된 어느 ‘힐링’ 연수의 기억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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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꿈’, ‘희망’, ‘미래’라는 단어들이 들어간 학년말 연수를 받았다. 대다수 교사들 뜻과 무관하게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마련한 연수였다. 학교측은 이 연수에 ‘힐링’이라는 말을 붙였다. ‘킬링’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생님들에게 치유(힐링)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 교사 중 누구도 학교에 ‘힐링’을 요구한 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시라’ 정도였다.


연수가 끝나고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소주 몇 잔을 함께 들이켰다. 몸과 마음이 갑작스럽게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연수 내내 감정 없는 웃음 속에서 유예되었던 서러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강요된 힐링의 뒤끝이라 이렇게 씁쓸한 것인가. 좋은 게 좋은 거라는데, 내 마음이 모나서 그런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그런 연수가 그렇듯 강사들은 시종일관 ‘긍정’과 ‘밝음’을 요구했다. 요구보다 강요라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온몸으로 웃기를 시키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구호로 외치게 했다. 솔직히 좋아하기 힘든 동료 교사에게 억지 웃음을 짓게 하기도 했다. 뜬금없이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그러다 또 아무 이유 없이 호쾌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긍정주의 심리학의 첨단 전도사들인 강사들은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연수 대단원의 백미는 마무리 시간이었다. 첫날 정한 각자의 마니또에게 ‘오글거리는’ 칭찬을 쏟아내야 했다. 어떤 용기(?) 있는 선생님은 연수의 마지막 자리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이유를 떠올리기 힘든 소감 발표 자리에서 내밀한 가정사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쳐내 여러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의아스러웠다. 그렇게 다감하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분들이 왜 평소 그다지 세상 불의와 어려운 이들의 삶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걸까.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한 번 더 품어주지 못하는 걸까.


그래도 어쨌든 칭찬을 하고 웃음을 짓는 게 좋은 게 아닌가? 그렇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자연스러운 상황과 함께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닌가. 원하지 않는 강요된 연수에서 쏟아내는 웃음과 칭찬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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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를 피로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냉철한 보고서 <피로사회>(2012, 문학과지성사)에서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오늘날 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했다. 한병철에 따르면 현대인은 모두 성과주체다. 비극적인 것은 이들 성과 주체가, “노동을 강요하거나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28쪽)라는 사실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 한병철(2012),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9쪽.     


피로사회의 성과주체가 자신을 착취하면서 생기는 대표적인 문제가 ‘번아웃(burn out)’이다. 프랑스의 노동사회학자 사빈 바타유는 <번아웃, 회사는 나를 다 태워 버리라고 한다>(2015, 착한책가게)에서 번아웃이 처음 출현한 것이 1970년대 미국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아메리칸드림’과 관련된다.


바타유에 따르면, 아메리칸드림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다음 세대로 갈수록 더 높은 삶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미국 시민들과 미국 사회 전체, 곧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물질적 편안함을 누리고 사회적 인정과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 안정적인 생활과 함께 존경받고 명예로운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을, 한병철 식 표현을 빌려 자기를 착취하는 성과주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타유는 번아웃이 3단계에 따라 나타난다고 보았다. 제1단계는 경고 단계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우리 몸은 호르몬(교감 신경을 자극하는 ‘카테콜아민’)을 방출하는데, 이렇게 되면 심박수가 올라가고 맥박이 빨라지며 각성 상태가 유지되고 체온이 올라간다고 한다.


제2단계는 저항 단계다. ‘당질 코르티코이드’라는 부신 피질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은 근육과 심장, 뇌에 필요한 에너지를 운반하기 위해 혈당치를 높여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몸이 스트레스의 대응 과정에서 필요한 에너지 소비에 대비한다는 것.


제3단계는 소모 단계로, 만성적인 스트레스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스트레스 조절 체계가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중추 신경계 수용체가 당질 코르티코이드 분비량에 전보다 더 둔감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속적으로 증가한 이 호르몬에 잠식된 우리 몸은 계속해서 활성화한 상태가 되고, 이에 우리 몸은 조금씩 지쳐간다고 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바타유에 따르면 번아웃 피해자 ‘그’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렇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모두 다 일에 투자한다. 일은 곧 그 사람의 전부다. 그의 삶이다. 그는 일을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일은 완전히 그의 삶의 일부이며, 그의 정신적 안정에 기여한다. 아이가 있으면 부모로서의 역할과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모두에 정성을 다하려 한다. 쉼 없이 일과 집안일을 연달아 한다. 모든 것을 세심히 살펴본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시간을 재고, 따져 보고, 살펴보고, 철저히 관리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쉬는 법이 없는 '에너자이저'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진행한다.


일하는 공간을 새로운 것을 구축해 가는 장소로 인식한다. 정복해야 할 우주, 자아 구축 공간, 결과물을 가져다주는 투자의 공간으로 본다.


개인적인 삶의 영역과 직업적인 삶의 영역 사이에 구분이 없다. 버스나 지하철 등을 통해 이동하면서도 그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기 위해 무언가를 모색한다. 집에서나 방 안에서, 휴가 중일 때나 주말에 직장 일을 안고 산다.


그 결과 그의 직업적 경력은 승승장구한다. 프로, 수준 높은 업무 전문가, 강한 도전정신의 소유자 등의 평가를 받는다. 병가로 직장을 쉬는 것에 대해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죄의식을 갖는다. 당연히 타인의 역량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댄다. 이는 그가 스스로를 프로로 여기며, 유능하고 의지에 넘치며 직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일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3

   

흔히 번아웃에 시달리는 몸을 ‘불이 붙은 기름통’에 비유한다. 기름통에 불을 지르는 것이 무엇일까. 개인의 성격적 특성과 조직 내 업무 관행, 성과제일주의를 최우선시하고 경쟁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중 바타유가 강조하는 해로운 조직 내 관행 세 가지에 주목해 보자.


권위적이거나 위협적인 조직 위계 질서와 특정 직원을 따돌리는 조직 분위기가 해로움을 가져온다. 조직 구성원이 늘 자기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만큼 지나친 감시에 근거한 규율 체계가 번아웃 상태를 조장한다.


마지막으로 상호 모순된 명령을 기반으로 한 운영 방식의 문제도 있다. 1956년 베이트슨이 고안한 뒤 널리 퍼진 유명한 ‘이중 구속 이론’에서 도출된 개념이라고 한다. 바타유는 베이트슨의 이중 구속 이론이 관계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고 지적했다.


이중 구속이란 서로 맞지 않는 두 가지 제약을 동시에 가하는 것이다. 한쪽의 의무 사항을 이행하는 것이 다른 한쪽의 의무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다. 바타유의 예를 빌리면 조직 내에서의 이중 구속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외연적 메시지: “부장은 내가 창의력을 입증해 주길 원한다.”
내포적 메시지: “그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절차와 규범, 일의 순서와 통제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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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이중 구속 신봉자들이 말한다. “협력하세요”. 나는 그 말 속에 “경쟁을 무시하면 절대 안 됩니다”가 숨어 있음을 잘 안다. 그들이 “착한 인성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물론 성적과 점수가 우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메시지를 읽는다.


그때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러나 그즈음 상당수 선생님들은 새 학년 인사 문제로 웃음을 짓기 힘든 상황이었다. 얽혀 있는 다른 선생님들과의 인사 경쟁에서 ‘패한’ 처지였다. 성과주체여야 할 당사자들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웃음’은 ‘눈물’을 머금었다. 몸과 정신의 소진은 지극히 당연한 다음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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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나는 성과주의에 기반한 경쟁과 시합을 무시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계획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꿈’과 ‘희망’과 ‘미래’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권한다. 계획하고 있는 ‘미래’가 없으면 지레 어두운 ‘미래’를 말한다. 당장 절망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선한 의도를 믿고 싶지만 가끔 너무 지나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모두가 ‘꿈’을 말할 때 ‘꿈 꾸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꿈’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처럼 간주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 맞서듯 ‘꿈 꾸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진정한 ‘꿈’과 ‘미래’를 찾아가는 길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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