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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25. 2016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해야 해요”?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1)

1

 

작년 이맘때쯤 수업을 공개했을 때였다. 지역 교육지원청의 수업컨설팅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문학, 시대의 돋보기’라는 대단원의 첫 번째 소단원인 ‘삶이 담긴 노래’에서 이육사의 <청포도>, <절정>을 엮어 읽는 활동을 했다.

 

이육사의 생애를 그린 10여분짜리 영상을 보고, 그 전 시간에 한 <청포도> 예비 감상 활동을  바탕으로 <절정>을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해 감상해보도록 했다. 하이라이트는 영인(가명)이가 <절정> 2연 1행에 있는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을 해석한 대목에서였다.


이육사는 박이만이라는 조선인 출신 악질 고등계 형사에게 17번이나 체포되었다. 박이만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체포해 잔학한 고문으로 굴복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반민족적인 행위에 생의 ‘목표’를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실패’한 유일한 인물이 이육사였다.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 영상을 보는 중간중간 전해 주었다. 영인이는 이육사의 그런 극적 생애에 감동했는지 모른다. 예의 구절에서 일제의 탄압에 지쳐 쓰러져 있는 독립투사의 모습을 읽어냈다.


이육사라고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가 없었을까. 잔인한 고문이 주는 두려움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얼마나 힘겨워했을까. 영인이가 그런 이육사의 삶을 공감하지 않았다면 그런 ‘멋진’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2


수업 중 자유롭고 허용적인 분위기가 주는 여유와 여백의 영향은 크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여유와 여백에 대한 교사의 ‘믿음’이다.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게 수업을 여유 있게 설계하고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믿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지식 위주의 입시 교육에서 인간적인 경험과 문화를 중시하는 ‘유도리(여유) 교육’으로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지식정보사회로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을 고려한 전 일본 사회의 합의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유도리 교육은, 2003년 국제학업성취도(PISA)에서 점수가 하락하고 순위가 추락하면서 후퇴하였다. 힘든 일을 기피하고, 독립심이 부족해진 젊은이들의 배후에 유도리 교육의 폐해가 자리잡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비판론자들의 주장대로 유도리 교육이 실패한 걸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3년 성인문해력평가(PIAAC)를 실시했다. 1위를 차지한 나라는 296점을 얻은 일본이었다. 토론이 가능한 3등급 이상 비율이 70퍼센트에 가까워 세계에서 가장 우수했다. 유도리 교육이 피사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성인 이후의 '실력'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평균인 273점을 얻어 11위를 차지했다. 토론은 힘들고, 웹 탐색을 통해 인터넷 문서를 읽고, 정보를 비교 대조하는 정도의 수준이 우리나라 성인들의 평균 수준이었다.


<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2015, 지식프레임)를 쓴 권재원 교사는 “한국을 교육에서 성공한 나라, 교육의 성공을 경제 성장으로 연결시킨 나라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해 온 전문가들을 몹시 당황하게 만드는 결과”라고 비판했다. 우리 식 공부와 배움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3


배움은 교과서에 쓰인 활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움은 만남이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 학생 자신의 내면과의 만남, 과거와 현재・나와 너・나와 사회・나와 역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배움이고 수업이 아닐까. 머리에 지식을 쌓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만남과 관계의 모든 순간들이 배움의 층위를 이룬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2005, 민들레)로 유명한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는 ‘배움의 생물학적 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육이란 세계에 대한 사실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다.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배움은 수동적으로 지식을 저장하는 활동이 아니라 삶에 유의미하게 참여하는 것이다.


4


동료 선생님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날이었다. 교실 ‘분위기’가 영 아니다 싶었나 보다.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 표현을 빌리면 ‘잔소리’를 조금 했다고 한다. 교과서 단원과 무관한 ‘인생’과 ‘도덕’ 이야기쯤 되었을 것이다.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잔소리’를 듣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못 본 체 했다. 평소 좀 유별나다 싶게 성적과 점수에 신경을 쓰는 아이였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였다. 그 아이가 교무실로 찾아와 쪽지를 건네 주었다고 한다. 쪽지에 글이 쓰여 있었다. 제목까지 있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해야 하는 이유”.


내용을 보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 안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니 수업을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고 한다.


그 아이에게 의미 있는 수업은 빈틈과 여유 없이 한 시간 내내 지식이 폭주하는 시간이리라. 그러니 교실에서 ‘인생’과 ‘도덕’을 논하던 그 선생님은 아이에게 ‘수업’을 하지 않고 잔소리로 대충 시간을 때우는 ‘불량 교사’ 정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는 ‘수업’에 대한 아이의 좁은 시선이 안타까웠다.


5


아이는 교과서와의 만남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다. 교사와의 만남에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않았다. 나날의 삶과 유리된 교과서 중심의 교육, ‘나’가 없는 수업과 배움에 몰두했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선생님이 설명하고 정리해 주는 것만 ‘수업’으로 여기는 그 아이는 자신만 아는 ‘괴물’로 커갈 가능성이 높다.


그 뒤 아이와 대화를 나눠 보았느냐고 여쭤봤다.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예의 쪽지가 매개물이 되어 선생님과의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고 (사고의) 경계 확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조금 아쉬웠다.


선생님 나름의 해법이 없지 않았다. 당장 섣부르게 대화를 나누는 대신 아이를 더 따뜻하게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그런 기다림 끝에 아이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쉽지 않은 그 길을 가려는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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