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3): 학생의 정치 행위 금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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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교육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논리의 근저에 갖가지 담론이 자리잡고 있다.
‘신성 교육론’. 교육은 순수하고 이상적인 것이다. 교육이 속악한 현실의 갈등과 대립이 투사되는 ‘정치’로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이다. ‘스승론’. 교사를 정치사회적 주체나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 교직이 신성 교육에 매진하고 헌신해야 하는 ‘성직’으로 간주된다. 스승론은 ‘교직은 성직이다’의 교육학적 버전이다.
청소년 미성숙론이 있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로 시작하는 비청소년들의 말 속에 청소년 미성숙론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어린 것들’로서의 그들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들의 현재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리숙하다. 비청소년, 이른바 어른들의 교육, 지도, 관리, 훈계, 보호, 기타 등등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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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미성숙론은 신중하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1919년 3‧1운동의 주역 중 하나인 유관순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7살의 청소년이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서울 전동보통학교에 다니던 11~12세 학생 4명은 1919년 3‧1운동 당시 ‘보통학교는 아이들을 모아 노예로 삼으려는 장소’라고 외치며 교실 유리창을 깨뜨리는 시위를 했다고 한다.[아래 1950~1960년대의 정치 상황과 ‘정치적’(?)인 청소년들 사례는 공현 외(2016), <우리는 현재다>에서 가져왔다.]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만 9살 때부터 ‘소년입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토론회와 강연회를 이끈 사회운동가였다. 18살 때는 ‘청년구락부’라는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었다. 청년구락부는 17~18세 무렵의 청소년 200명이 몰래 모여 만든 단체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발행이 금지된 <독립신문>과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배포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기까지 했다.
우리 헌법의 한 뿌리가 되고 있는 1960년 4‧19 혁명은 서울 시내 고등학생들의 시위로 폭발했다. 4월 19일 아침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동대문 거리로 나섰다. 밤새 결의문을 작성하고, 밀가루 포대를 이어 붙여 만든 현수막에 ‘민주주의 사수하자’라고 썼다. “정부는 마산 사건을 책임져라!”, “3‧15 협잡선거를 물리치고 다시 선거하자!”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4‧19혁명이 발발하고 1주일 후인 4월 26일, 시민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했다. 이 시민대표단에 설송웅이라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설송웅은 서울 지역 20여 개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모임 ‘협심회’에서 활동하던 학생이었다. 혁명의 주도 세력에 고등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도 놀랍지만, 고등학생 대표자가 대통령 면담에 참여한 사실은 더욱 놀랍다.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10대 청소년들에 관한 ‘미성숙론’이 대체로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역사적 사례들에서 보이는 청소년들의 정치사회적 행위 역량은 비청소년의 일반적인 관점과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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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31조 제4항의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교육기본법> 제6조 제1항의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로 구체화한다.
교육의 자주성이나 정치적 중립성 조항은 역사적 연원을 갖는다. 전체주의(파시즘)나 일당 독재 체제 경험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이 이들 조항의 근저에 깔려 있다. 전체주의 통치자나 독재자들은 교육을 국가나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학교와 학생은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교육이 정치에 종속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교사와 학생이 정치 시스템의 하부 조직으로 운용되었다.
1956년 이승만 정부는 제3대 대통령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부기관 권력을 이용해 이승만 지지 시위를 대대적으로 조직했다. 중고등생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매년 3월 2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축하 기념 작문대회를 열어 대통령 찬양 글을 짓게 했다고 한다.
1959년, 한 중학교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학생이 작문대회 때 “대통령 머리는 된서리를 맞아서 하얗다”라고 한 줄을 적어서 냈다가 교감에게 뺨을 수없이 맞고 기합을 받았으며 반성문 작성을 강요받고 정학 조치를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때 교감은 그 학생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폐교당하는 꼴을 보려고 이러냐!”라고 했다. - 공현‧전누리(2016), <우리는 현재다>, 빨간소금, 88쪽.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대구 지역 학생들은 갑자기 등교 통보를 받았다. 이 해 3월 15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가 대구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민주당 유세에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을 우려했다.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정부는 지역 교육위원회를 통해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다.
2011년 8월 8일 김행수 선생님이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의무 아닌 권리”에는 헌법이 보장한 교사의 ‘권리’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한 것이 교사가 아니라 권력이라며 다음과 같은 사례를 글머리에 소개했다.
장면 1: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만이 살 길이다”라는 유신 옹호 노래를 만들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부르게 하고, 교사가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학부모와 국민들에게 “삼권분립은 18세기적 생각이며 우리나라는 유신체제가 맞는 체제다”라고 유신을 홍보하도록 하였다.
장면 2: 전두환 5공 군사독재 시절 교실에서 교장과 교감이 교무실에서 민정당 입당 원서 또는 선거운동원 등록원서 들고 다니면서 “아무 것도 아니니 그냥 서명만 하면 된다”고 교사들 사인을 받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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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자주성이나 정치적 중립성 조항은 교육이 정치적 당파의 영향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권리’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국가 권력이나 정부기관이 교육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 교사나 학생에게 정치적인 표현이나 활동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와 무관한 학교, ‘정치적’이지 않은 교육은 없다. 학생과 교사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허하라.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방정환이다. 인터넷 <한민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1783)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