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Mar 29. 2017

우리는 책을 읽는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8)

1     


우리는 책을 읽는다. 아침 등교 후 20여분간 책읽기 시간을 갖고 있다. 대략 8시 30분부터 50분까지다. 그사이 기도회가 열리고, 가끔 간단한 조회를 갖는다. 학년 초부터 시작했다. 똑같은 중학교 2학년인데, 작년과 올해의 독서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학생들 성향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말이나 태도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책을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학생들에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찾아 활용하는 일이 쉽지 않다. 자투리 시간에 친구를 만나거나 매점에 가고, 못 해 온 과제를 하기도 한다. 아무 일 안 하고 그냥 쉬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바쁜 시간을 보낸다.     


2     


요며칠 집에 있는 책 수십 권을 학급으로 챙겨갔다. 원래 교실마다 3단짜리 조그만 서가가 1개씩 있었다. 작년 우리 반이었던 교실을 올해도 그대로 쓰게 되면서 서가를 특별히 손 볼 이유가 없었다. 그곳에 꽂혀 있는 책도 작년 초에 한 번 솎아 정리한 것들이었다.     


그러다 올해 우리 학교에서 1학급이 줄면서 교실 하나를 리모델링하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서가를 우리 교실로 챙겨왔다. 빈 칸을 채워야 했다. 몇몇 학생들이 책을 가져왔으나 태부족했다. 집에 있는 인문 사회 분야 책들을 며칠 전부터 실어날랐다.      


서가는 교실 앞쪽 왼편 구석 자리에 기역 자로 놓았다. 책들을 가지런히 꽂고 나니 제법 풍치가 있어 보였다. 맨 위쪽에 조그만 화분도 놓았다. 시계와 그림 액자 몇 개만 벽에 걸려 있어 삭막했던 반 분위기가 담박하면서도 따뜻하게 바뀌었다.      


조만간 학교에서 5단짜리 키다리 서가도 설치해 주기로 했다. 반대편 구석 자리에 그걸 놓고 책으로 채워 넣으면 교실이 더 포근한 공간으로 바뀔 것 같다. 몸이 조금 더 풀리면 점심 시간에도 교실에 가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3     


나는 아침 조회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책을 읽는다. 우리 반에는 등교하자마자서부터 책을 읽는 학생들이 몇 명 있다. 나는 교실에 들어가 앞쪽 교탁 옆 키다리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별다른 말없이 책장을 펼쳐 들고 앉아 있으면 소란하던 교실이 차차 조용해진다. 과제 준비 등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학생들도 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대화한다. 그 자차분한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오늘 종회가 끝난 뒤였다. 학부모 상담이 예정되어 있어 조금 늦게까지 교무실에 있었다. 밖에 내놓은 화분 생각이 나 교실 쪽으로 향했다. 화분을 들여놓고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서가 앞에 가 보니 내가 가져다 놓은 책 수권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침에 책을 챙겨넣을 때 와서 관심을 보이던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책을 읽으려고 챙겨간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아침 학생들에게 책읽기의 추억을 이야기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4     


좋은 책을 잡으면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렇게 읽고 난 뒤 글을 쓰면 단어와 문장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내밀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비운의 왕족 이방자 여사가 이사장으로 있던 어느 재단에서 주최하는 독후감 공모전에 참가하였다. 지정 도서가 특이했다. ‘분재’를 키우며 역경을 딛고 일어선 어느 청소년 주인공의 성장담을 그린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소녀와의 애틋한 만남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자취방에서 밤새 읽은 뒤 일필휘지로 독후감을 써 내려갔다.      


그때 경험한 감정과 의식의 충일을 잊지 못한다. 날고 기는 천재와 영재들 사이에서 학교 성적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가난한 자취생의 구질구질한 일상이 괴로웠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었다. 점심 시간마다 학교 도서실에 파묻혔다. 독후감 공모에 응한 것도 그런 비루해 보이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얼마 후 메달과 함께 상을 받았다. 상을 받아서 좋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만나고 삶을 새롭게 돌아보게 되었다는 데서 더 큰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책이 아니었다면 맛보기 힘들었을 귀한 선물들이었다.     


5

    

책읽기를 ‘의무’나 ‘과제’처럼 여기는 교사와 부모들이 있다. 그들은 학생과 자녀들에게 책을 ‘강요’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책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책을 손에 쥘 수 있다. 책이 싫어지지 않게, 책 읽기가 폼 나고 우리에게 두루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스스로 책을 골라 읽는 그 특별한 시간들이 우리 자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길임을 믿는다.


* 제목 커버의 배경과 본문에 있는 사진들은 무료 이미지 사이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

작가의 이전글 ‘세월호’와 ‘일베’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