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교는 ‘공교육’ 기관이다. 교육목표가 무엇인가. 대학교육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법률은 <고등교육법>인데, 이 법은 초‧중등교육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는 <교육기본법> 제9조에 따라 만들어졌다. 따라서 고등교육(대학교육)의 총괄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구체적인 교육목표 또한 초‧중등교육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이념’)에서 찾아야 한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육은 학생들을 ‘자주적 생활인’, ‘민주시민’으로 길러내고 있는가.
2
빌 레딩스 캐나다 몬트리올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는 《폐허의 대학》에서 오늘날 대학이 초국적인 관료적 기업이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 대학은, 민족문화의 이념을 생산하고 보호하고 주입하는 역할을 통해 국민국가의 운명과 맺어지던 과거 위상을 버리고 기능의 모든 측면에서 수월성을 추구해야 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학은 이제 일차적으로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아니라 자율적인 관료적 기업이다. 비중은 덜할지 몰라도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대학은 전미농구협회(NBA)에 비교될 수 있다. - 빌 레딩스(2015), 《폐허의 대학》, 책과함께, 70쪽.
3
《오늘의 교육》 제37호(2017년 3‧4월호)에 실린 박리리의 <돈만 밝히는 ‘후머니타스’ 칼리지?>와 하승우의 <대학은 누구를 위한 장소인가>를 읽었다. 문득 몇 년 전 읽은 프랑스 태생의 정치학자 니콜라 귀요가 쓴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가 떠올랐다.
귀요의 책은 ‘자선’마저 ‘사업’으로 이용하는 세계적인 슈퍼리치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것이다. 자본과 시장의 놀이터가 돼버린 대학에 관한 글을 보다 몇 년 전의 독서 기억을 특별히 되새기게 된 까닭은 그 책에 나오는, 조지 소로스가 헝가리에 세운 중부유럽대학 이야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딩스가 냉소적인 어조로 이야기한 “대학은 전미농구협회(NBA)다”의 생생한 사례이기도 했다.
애초 중부유럽대학의 설립 목표는 실무적인 경영 관리 능력과 정치적인 실용주의로 무장한 직업 전문가 양성이었다. 소로스는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담론이 교육과정을 완전히 지배하는 대학 모델을 구상했다고 한다.
영리하게도, 유럽중부대학은 전통적인 인문학에 바탕을 둔 교양 교육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자유시장주의의 본거지로 비춰지는 것을 막는 ‘치장’ 작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이 얼굴 마담처럼 취급받고 있는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귀요는 중부유럽대학이 탈국가적이고 ‘범세계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으로 자처하면서 모든 국가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로 전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세계적인 통치 계급을 육성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돈줄’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금융세계화를 해치지 않고 세계적인 거버넌스를 보장해주는 통치를 위한 지식의 생산 공간으로 이 대학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기업이 대학에 ‘돈’을 주는(투자하는) 것은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하승우에 따르면, 《대학과 제국》에는 카멜롯 프로젝트, 트로이 프로젝트 등 미국이 남미나 다른 제3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들이 대학 프로젝트로 발주되었으며, 사회학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4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대학교가 ‘진리의 상아탑’이나 ‘지성의 전당’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오히려 학부모들은 오늘날 이 도저한 자본지배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학교가 자기 자식들에게 ‘경쟁력’의 표지인 ‘학벌’을 안겨주고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도 될까.
하승우는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학교는 학생들을 자본주의의 총아로 만들어 주는 곳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박리리와 하승우가 각자의 글에서 전하는 대학들의 풍경은 스산하다. 경희대학교는 (대학 알리미 공시 지표 기준으로) 한 해 등록금 수입이 2800억 원, 전체 예산이 5000억 원이 넘는 대표적인 대형 사립대학교다. 그런데 등록금 수입의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 강사 인건비(26억 4천만 원)를 줄인다면서 2015년 성탄절 이브에 시간강사들에게 이메일로 ‘강좌 미개설’이라는 이름의 ‘해고’ 통지문을 보냈다.
대학 강의실은 신분이 매우 불안정하고 노동조합도 만들지 못하는(않는) 선생들이 알바와 과제와 시험에 찌든 학생들과 메마른 대화를 나누는 곳이 돼버렸다. 대학 구내 식당은 학생들의 건강보다 가격을 먼저 고려하는, 위탁 외식업체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민간기업이 직접 건설해 일정 기간 운영해 자금을 회수하고 15~20년 뒤에 대학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대학 민자(BTL, 민간투자) 기숙사는 신입생 의무 입실제, 일반 기숙사보다 2~3배 비싼 입주비, 식권 강매제(식권을 사지 않는 학생은 강제 퇴사까지 시킴.) 등을 통해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하고 있다.
민간 사업자가 관리하고 운영하는 운동장이나 강의실은 운동하고 토론하는 학생들 대신 첨단 보안장치가 차지한다. 행정효율화 명목으로 학생증이 은행 체크카드로 대체되면서 개인정보가 손쉽게 금융기관으로 넘어간다. 외주화에 따라 각종 서류 발급 비용도 높아지고 있다.
5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풍경들이다. 가령 기업은 산학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대학과 연계하면서 질 좋은 청춘 노동력을 싼 값이나 공짜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면서 엄연히 사업처럼 굴러가는 일에 ‘연구’니 ‘지원’이니 하는 말을 붙여 씀으로써 기업이 자사를 홍보하는 수단의 하나로도 활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자본은 고스란히 기업 몫이다. 대학에 건물을 지어주는 대가로 ‘포스코관’이니 ‘삼성관’이니 ‘현대차 경영관’이니 하는 회사 이름을 붙여 홍보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이윤을 창출하는 ‘영업장’이 아니다. 대학이 공적 교육기관으로서의 본 모습을 찾을 필요가 있다. 글쓴이들은 ‘약자’ 지지하기와 ‘불화’와 ‘연대’를 강조했다. 내가 보기에는 사립학교의 공공성보다 자주성을 강조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염불이다. 불화와 연대의 목소리를 모아 새 정부가 그쪽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