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54)
1
스승의 날이 하루 앞이다. 직업이 교사여서 나름 ‘민감하게’ 여기는 날이다. 졸업하여 곁을 떠나간 제자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스승’처럼 살았는지 돌아본다. 지금 내 곁에 있는 학생들에게 다만 ‘선생’인지, 아니면 ‘스승’ 비슷한 존재인지 자문해 본다. 부끄럽게도 나는 어떤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돌아보면 제자들 앞에서 ‘나’를 앞세운 때가 너무 많았다. ‘내 생각이 옳고 너희가 그르다, 내 말이 맞고 너희는 틀리다, 내가 넓고 사려 깊게 본다면 너희들은 좁고 얕게 본다’.
아침 조회를 하는 교탁 앞에서, 수업을 하는 교실 칠판 주변에서, 그리고 어떤 못마땅한 일 때문에 손을 크게 휘저으며 학생들 앞에서 장광설을 펼치는 동안에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잘난 체하는 꼰대와 독재자와, 고집불통의 잔소리꾼이 되었다. 부끄럽다.
2
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진지충’으로 통한다. 매사를 내 기준에 따라 해석하되, 지나치게 정색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니 재미가 없다. 스스로 다변형이 아니라 사색형이라 여긴다. 그래서일 것이다. 학생들이 내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내가 꾸려가는 수업은 정적이거나, 필요 이상으로 진중해질 때가 잦다. 흔히 말하는 ‘재미’와 거리가 멀다. 학기 초에는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재미’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는 학생들이 크게 낙심해 할 것 같아 ‘또 다른 재미’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유머와 거리가 먼 교사다. 흔한 ‘아재 개그’조차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 어떤 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른 자리에 가 전해줄 때가 있다. 이야기가 내 입을 타고 나오는 순간 묵직한 ‘다큐멘터리’나 ‘논픽션’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묘한 표정을 짓는 학생들 얼굴을 보며 나는 극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또 교사로서 성정이 못나고 좁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스승’이라는 말이 주는 모종의 상징적인 무게감 때문에 부담감을 느낀다. 우리 교사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그저 가르치는 ‘기계’로 살게 하면서 교사들이 스승처럼 살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듯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강한 저항감을 갖는다.
그 때문일까. 학생들 앞에서 스승으로 살고 싶다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솔직히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스승으로 살아갈 의지와 열정과 능력을 가지려 하기보다 내 한 몸 추스르며 살아가는 데 더 큰 힘을 쏟았다.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다만 나는 학생들에게 평범한 선생으로, 부끄럽지 않은 선생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못난 선생인데, 학생들은 내게 너무나 ‘착하다’.
나는 지금 학생들이 보내준 편지를 다시 찬찬히 읽고 있다. 지난 주 월요일 아침 우리 학교 학생들 모두 두 시간에 걸쳐 ‘특별활동’을 했다.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과 스승님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활동이었다. 그때 학생들이 건넨 편지들이다.
누군가는 복도에서 따뜻하게 인사를 받아준 것만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지각을 했을 때 혼을 내기보다 자초지종부터 들어주었다며 진심으로 자신의 습관을 돌아보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것도, 1차 고사에서 성적이 오른 것도,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내 덕분이었다.
그들의 삶을 이끄는 주된 동력이 나였다. 나는 한편으로 무서움과 커다란 부담감을 느꼈다.
4
일본 교육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스승은 있다>라는 책에서 ‘나름의 스승’을 강조했다. 다른 이가 “무슨 그따위가”라며 혹평할지라도 ‘나름의 스승’은 그런 시선과 무관한 지점에 존재한다. 그는, 그를 ‘스승’으로 여기는 다른 이들의 마음과 눈 속에서만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우치다 선생이 말하는 ‘스승’은 ‘수수께끼 선생님’이다. 제자가 결코 전모를 알 수 없는 선생님이라고 해도 되겠다. 우치다는 이를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무지(無知)의 선생님’이라고 표현했다. 제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곧 자신의 지(知)가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교사이지 스승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수수께끼 선생님’이나 ‘무지의 선생님’이 되어 ‘나름의 스승’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말 한 마디와 우연한 표정 하나와 교탁 앞에서 보이는 몸짓 하나만으로 ‘스승’의 포스를 풍길 수 있는 존재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편지 끝에 “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시고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쓴, 여드름이 자글자글한 14살짜리 제자 영수(가명)를 떠올린다. 해묵어 상투어가 돼버린, 때로 부담감을 주고 저항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리하여 이제는 누구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스승’이라는 단어와 그 깊은 의미를, 타락한 날의 대명사 같은 날이 돼버린 스승의 날 전날에 찬찬히 되새겨 본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