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의 정치사회적 존재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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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교직에 들어섰다. 보름여가 지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 투철한 이념이나 사명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역 사립학교 소속이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일개 교원으로서 최소한의 생존권(?) 확보 의도가 컸다. 이른바 ‘전교조 보험론’이다. 교사들이 결집된 목소리를 내야 대사회적 위상이 커질 것이라는, 약간은 거창한 이유도 조금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교조가 내 교직 삶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나는 전교조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사회적 존재론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작금의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아래서 전교조만한 ‘비주류 세력’이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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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가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 학교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의 파업에 반대하여 탈퇴하는 전교조 교사들이 있나 보다. 문재인 정부를 진득하게 기다려주지 않고 구태의연한 연가 투쟁을 한다며 날선 비판을 하는 조합원들도 있는 것 같다.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전교조에 대한 공격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완벽한 집단이 있을 수 없으며, 이는 전교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는 필요와 실상 이상의 비판과 비난이 전교조에 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교조를 비판하는 이들이 즐겨 쓰는 논점이 몇 가지 있다. 이념 편향, 과격한 투쟁 중심의 활동, 내부 정파 갈등,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 따위다. 두서 없이 나열한 이들 문제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논증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관점에서 몇 가지 주장을 펼쳐 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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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노동조합이다. 전교조 소속 조합원은 교육자이면서 노동자다.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힘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까. 대동단결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출현했는지 상기하자. 구조적으로 약자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기댈 것은 ‘머릿수’다.
교사들은 사분오열 상태다. 전국적으로 43만여 명의 교원이 있다. 전교조 조합원은 5만 명이 조금 넘는다. 최대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회원이 12만 명 정도다. 우리나라의 ‘조직원’ 교사는 기타 군소 조직까지 합해도 전체 교원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대다수 교사들은 ‘무적자’ 상태로 살아간다. 국대 최대인 교총이 임의단체인 점을 고려할 때, 절대 다수의 교사들이 정치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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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고 사분오열 상태에 있는 교사 노동자들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지리멸렬하다. 가령 전교조 조합원들에게 노동기본권 세 가지 중 단결권이 인정된 것은 출범(1989년) 후 10년이 지나서였다(1999년). 이마저도 해직교사에게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는 전교조 내부규약을 빌미로 박근혜 정부가 ‘노조 아님’ 통보를 내리면서 상실되었다.(2014년) 민주 시민의 핵심 기본권인 정치적 자유권은 거의 ‘금치산’ 상태에 있다. 직무 활동 내외를 막론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나 정치활동의 자유를 철저히 봉쇄당하고 있다.
내게는 이 모두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정부 잘못이 크겠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자신들의 결집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집단에게 ‘알아서’ 권리를 보장해 준 국가나 정부의 사례를 알지 못한다. 힘을 합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워도 힘들었다. 절대 다수가 정치사회적 무적자로 있는 교사 집단임에랴. 덧붙이자면 10대 청소년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거나 구현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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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다. 전교조 분열(?)의 신호탄이 올랐다며 일부 언론이 호들갑을 떤 일이 있었다. 소수의 전교조 활동가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교사노동조합(서울교조)을 출범시켰다.
조심스럽게 말해 보자. 서울교조는 기존 전교조 지도부의 주류 그룹에 밀린 비주류 그룹이 독자 세력화에 나선 예로 보였다. 당시 지역별 교사노조를 표방하는 목소리가 컸다. 분권과 자치가 시대 조류다. 서울교조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까.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서울교조는 창립선언문(2016년 12월 8일자)에서 “교사들의 벗이 되는 노동조합”을 표방했다. 벗 구실을 하는 노동조합이 누구인가. 노동조합이 노동자고 노동자가 노동조합이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벗이다. 노동자의 벗 노릇 하는 노동조합은 없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벗이 되겠다는 서울교조의 말은 내게 공허한 수사처럼 들린다.
서울교조는 노동조합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도별로 다양한 급별·설립자별·교과별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조합들의 전국적 연대체인 교사노동조합총연맹(교사노총)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유감스럽지만 서울교조가 추진하는 교사노총안은 분열의 프레임을 강화할 것이라고 본다. 서울교조의 출범 기조와 같은 것으로 보이는, 작금에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여러 색깔의 교사 단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교사 집단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조직)들을 상대주의적 비교와 경쟁의 구도 속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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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조로 대변되는 새로운 교사 조직체들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양성 지향, 조직의 경량화, 권한 분산, 의사결정 구조의 개변 등 이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언뜻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온전한 교육자치‧교육분권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새 정권 출범 이후 교육시스템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그 근본 기조가 완전한 자치와 분권 시스템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뀔 것 같지 않다. 톱-다운 방식의 국가주의 교육정책과 교육제도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방제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국가주의 정책과 제도의 자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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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적실한 해법은 하나다. 교사들이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으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교사의 정치사회적 조직체에 관한 한 나는 ‘빅텐트론자’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내게는 두 가지 바람이 있다.
첫째, 교사들 사이에 빅텐트론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둘째 빅텐트의 중심에 전교조가 서기를 기대한다. 전교조가 만들고 모두어 온 역사와 조직이 교사 계층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을 진일보하게 만들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전교조는 출범 이래 수십 년 동안 범정권 차원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다. 교육정책과 교육제도의 변천사와 교육문화운동의 부침사가 전교조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교조의 역사에 함의되어 있는 ‘정당성’과 그 힘을 무시하기 힘들다. 적폐의 본산인 박근혜 정권이 왜 전교조를 ‘주적’으로 삼아 지속적인 탄압을 일삼았는지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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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교육 시스템 아래서 전교조는 ‘다른 목소리’를 대변한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전교조가 내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교육이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다고 본다.
정치와 행정이 교육을 분열과 배제의 벌판으로 끌고 갈 때 전교조는 그 한복판에 서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야만적인 일제고사 시행을 못 본 체하고, 4‧16 세월호 참사에 침묵하며, 국정 역사교과서와 성과급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육 현장을 떠올려 보라.
문제는 전교조가 전교조 내부나 여타의 교사 집단 사이에서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교조 비판론자들의 단골 메뉴인 이념 편향, 과격한 투쟁 중심의 활동, 내부 정파 갈등, 비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 들의 문제도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