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교육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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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10조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국가가 모든 개인이 갖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헌법> 제37조 제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로 되어 있다. 모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으로, 기본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를 금지하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초‧중등교육법>을 ‘인권‧민주 시계’의 관점에서 이해해 보자. 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현행 <헌법> 제10조 제1항에 있는 ‘인권’이라는 단어가 <헌법> 조문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62년 12월 26일자로 개정된 헌법 제6호부터서였다. <초‧중등교육법>은 1997년에 제정되었다. 제정 당시 인권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학생의 인권 보장에 관한 조항이 <초‧중등교육법>에 처음 실린 것은 2007년 12월 14일 제18조의4가 신설되면서였다. 다음과 같다.
학교의 설립자‧경영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지나칠까.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동안 <초‧중등교육법>상 학생의 인권‧민주 시계는 1962년 12월 25일에 멈춰 있었다! 달리 ‘인권’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최초로 등장하는 1962년 12월 26일부터 학생 인권 보장 조항이 <초‧중등교육법>에 처음 실리는 2007년 12월 13일까지 학생 인권이 법의 사각시대에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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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교육법>의 인권‧민주 시계는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조항이 신설되어 편입된 시점인 2007년 12월 14일부터 매끄럽게 흘러왔을까. <초‧중등교육법>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내 관련 조항을 통해 알아보자.
학생 인권 보장 여부를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해 주는 단서가 학생의 두발과 복장 등 용모에 관한 학교규칙(학칙)이다. 소지품 검사나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 등에 관한 학칙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1항은 학칙 기재사항을 나열하고 있다. 1998년 제정 당시부터 제1호(“수업연한‧학년‧학기 및 휴업일”)부터 제10호(“기타 법령에서 정하는 사항”)까지 10개 항목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 중 제7호는 학생 포상과 징계에 관한 사항이다.
제7호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1년 3월 18일이었다. “학생포상 및 학생징계”로 간명하게 되어 있던 문구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학생포상, 징계, 징계 외의 지도방법 및 학교 내 교육‧연구 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
“징계 외의 지도방법 및 학교 내 교육‧연구 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이라는 문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진보 성향의 교육시민사회단체에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문구가 학교에서 간접 체벌을 허용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년이 지난 2012년 4월 20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7호는 한 번 더 변신한다. 대다수 학생들에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용모,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사용에 관한 항목들이 학칙 기재사항에 새로 편입되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학생포상, 징계, 징계 외의 지도방법, 두발‧복장 등 용모, 교육목적상 필요한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 및 학교 내 교육‧연구 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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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모와 소지품 검사 항목들은 징계와 포상에 관한 학칙 기재사항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느닷없이 끼어들어간 이유가 있었다.
제7호 개정에 즈음하여 경기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서울에서는 체벌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들 지역은 모두 ‘진보 교육감’이 수장으로 있었다.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시행령 통치 기법이 동원되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7호 개정을 통해 단위학교에서 두발과 복장,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사용에 관한 학칙을 제정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교과부가 제7호 개정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단위학교의 자율성 강화였다. 단위학교의 장에게 학칙 제정권을 부여함으로써 학교민주주의가 강화될 것처럼 홍보하였다.
교과부의 작업은 치밀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7호에 최초의 변화가 생긴 2011년 3월 18일 시점에 제4항을 신설하였다. 학칙 제정이나 개정 시 학교의 장이 해야 할 책무에 관한 내용을 다음 (가)처럼 규정해 놓았다.
(가) 학교의 장은 제1항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이 항은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12년 4월 20일(나)과, 또 다시 1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인 2013년 2월 15일(다)에 변화를 거듭한다.
(나) 학교의 장은 제1항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다) 학교의 장은 제1항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학칙 제‧개정 시 학교 구성원 일부(학생)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한 조항을 신설하고(가), 이후 의견 수렴의 대상 범위를 학교 구성원 전체(학생, 학부모, 교원)로 확대시키는 쪽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나, 다). 표면적으로 학교장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적인 절차 준수에 충실하게끔 하는 기조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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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4항의 신설 시점이 제9조 제1항 제7호의 최초 변화 시점과 일치하는 점에 주목하자. 제4항에 의견 수렴의 대상 범위를 확대하고, 학교장의 책무를 강화하는 내용을 추가하는 개정이 서울과 경기와 광주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학생 인권 문제가 전국적인 이슈가 된 시점과 겹쳐진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의도는 명확했다. 교과부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개정에 관한 보도자료에서 “동 시행령 개정에 따라 서울, 광주, 경기 <학생인권조례> 중 학칙으로도 일체의 생활규칙을 정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은 상위법령인 동 시행령에 위반되어 실효된다”라고 주장했다. 겉으로 단위학교의 학칙 제정권을 강화하여 학교민주주의를 증진할 것처럼 홍보하면서 속으로는 <학생인권조례>에 따른 인권친화적 학칙 개정을 훼방 놓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시행령에 위반되어 실효된다”라는 식의 교과부 주장은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궤변’에 불과하다. 용모, 복장 등에 관한 학생 인권을 학칙으로 제한할 수 있게 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제1항 제7호는 상위법인 <초‧중등교육법>을 위반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4가 어떠한 제한 단서 없이 학교 설립자와 경영자, 학교장으로 하여금 학생 인권 보장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중등교육법>의 인권‧민주 시계는 2007년 12월 14일에 머물러 있다. 하위법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악성 조항이 학생 인권 보장의 의무에 관한 상위법 조항의 정신을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내내 교육 적폐의 온상이 되었던 무수한 시행령 무단 통치의 한 사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