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교육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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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교육법> 제8조는 흔히 ‘학칙’이나 ‘교칙’으로 지칭되는 ‘학교 규칙’(아래 ‘학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 조문은 다음과 같다.
① 학교의 장(학교를 설립하는 경우에는 그 학교를 설립하려는 자를 말한다)은 법령의 범위에서 학교 규칙(이하 “학칙”이라 한다)을 제정 또는 개정할 수 있다.
② 학칙의 기재 사항과 제정‧개정 절차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8조가 현재 상태로 바뀐 것은 2012년 3월 21일이었다. 그 전에는 다음과 같았다.
① 학교의 장(학교를 설립하는 경우에는 당해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를 말한다)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지도·감독기관(국립학교인 경우에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 공·사립학교인 경우에는 교육감을 말한다. 이하 “관할청”이라 한다)의 인가를 받아 학교규칙(이하 “학칙”이라 한다)을 제정할 수 있다.
② 학칙의 기재 사항 및 제정 절차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2항을 보면 기존에 ‘제정’에 관한 사항만을 담고 있는 것에서 ‘제정’과 ‘개정’을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학칙 개정이 학교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와 사회 분위기의 추이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개정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제1항의 개정은 어떨까. 구체적인 개정 내용을 보자. 학칙 제정이 정부(장관)나 지자체(교육감)의 ‘인가’ 절차 없이 학교장의 자율적인 판단에 이루어질 수 있게 바꾸어 놓았다. 단위 학교에서 상급 행정권력 기관의 간섭 없이 학칙을 개정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항에 대한 평가와 비슷하게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2
<초‧중등교육법> 제8조가 개정되던 시기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권 인수를 본격화하던 때였다. 개성과 자율보다 획일과 통제가 정책 기조의 핵심으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나 교육청에 의한 학칙 인가 절차는 전형적인 관료 행정의 하나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초‧중등교육법> 개정 움직임은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신장하고 강화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새로 들어서는 박근혜 정부의 ‘본질’과 많이 달라 보였다.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의 숨은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당시 교과부는 지도‧감독 기관의 학칙 인가권 폐지가 단위학교에서 학교 구성원의 의견과 학교의 특수성을 반영해 학칙을 자유롭게 제정하여 운영할 수 있게 한 조치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학교 내에서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촉진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일부 ‘진보 교육감’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거셌다. 이들은 평소 요식적인 관료 행정 혁신과 학교 민주주의 강화를 외쳐 왔다. 정부의 개정 작업에 힘을 실어주는 게 마땅하지 않았을까.
교과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배경 단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당시 진보 교육감들을 중심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움직임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보수적인 교육 관료들과 학교장들을 중심으로 ‘학교 붕괴’에 대한 우려가 ‘괴담’ 수준으로 퍼지고 있었다. 조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제8조는 그들에게 ‘신의 한 수’였다. <초‧중등교육법> 제8조 개정 이전에도 정부와 교육감의 학칙 인가는 요식적인 절차 중 하나였다. <학생인권조례>에 공포심(?)을 갖고 있는 학교장이 형식적인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학생인권조례>를 무시한 학칙을 만든다.
정부나 교육감은 이미 학칙 인가권을 잃어 단위 학교에 대한 지도‧감독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교육계 내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메커니즘을 상상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학교들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초‧중등교육법> 제8조가 얼마든지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학교 내 의사결정 과정을 살펴보면 학교 구성원 전체 자율이 아니라 학교장의 자율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3
나는 <초‧중등교육법> 제8조 개정의 통시론을, 학교장의 자율을 학교(구성원 전체)의 자율로 보는 착시의 오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자율을 원하지 않거나 누릴 능력이 없는 주체들에게 허여되는 자율권은 기존 제도의 답습이나 관성적 반응만을 불러올 뿐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확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단위 학교에서 보편적인 인권 개념에 터 잡은 학칙 개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제8조는 결과적으로 학교장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학칙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초‧중등교육법>의 ‘인권‧민주 시계’는 더디기만 하다. 이는 <초‧중등교육법>의 하위법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역시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