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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26. 2017

초‧중등학교 교육과정과 ‘음모론’

수상한 교육법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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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군산중등지회 교사 공부 모임에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아래 ‘<교육과정>’)을 놓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제일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일종의 대표 발제자처럼 문제를 제기하고, 나머지 참석자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내가 제기한 문제는 <교육과정>에 숨어 있는 모종의 ‘음모론’이었다.


<교육과정>은, 문서의 들머리에 서술되어 있는 ‘교육과정의 성격’을 제외하고 보면 본편이 크게 ‘교육과정 구성의 방향’, ‘학교 급별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기준’, ‘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 ‘학교 교육과정 지원’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과정> 입안자들이 숨겨 놓은 것으로 본 ‘음모론’을 읽어낸 곳은 ‘교육과정 구성의 방향’에서였다. ‘교육과정 구성의 방향’의 체제를 살펴가면서 그 ‘음모론’의 실체를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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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구성의 방향’은 ‘추구하는 인간상’과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과 ‘학교 급별 교육 목표’ 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 급별 교육 목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순으로 열거된다. 이들 학교 급별 목표는 각각 네 문장씩으로 제시되어 있다.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네 가지다.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 “교양 있는 사람”, “민주 시민으로서 더불어 사는 사람” 들이다. 나는 “자주적인 사람”이 맨 첫 자리에 놓이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피수식어인 “자주적인 사람”을 꾸며 주는 수식어들에 “자아정체성 확립”, “진로와 삶을 개척”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심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추구하는 인간상’ 구현을 위해 초‧중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전 과정을 통해 중점적으로 기르고자 하는 ‘핵심역량’ 여섯 가지 중 맨 첫 자리에 ‘자기관리 역량’이 자리잡고 있다. ‘자기관리 역량’은 ‘자아정체성’, ‘자신감’, ‘삶과 진로에 필요한 기초 능력’, ‘자기주도적 삶’ 들의 단어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주(自主)’의 말 뜻 그대로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역량이다.


아름답고 긍정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자유로운 교육활동 속에서 온전하게 ‘자아정체성’이나 ‘자신감’을 기른다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될 것 같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관리’하라고 한다. ‘자아정체성’과 ‘자신감’을 일정한 통제선 안에 두고 거기서만 살피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나’가 온전히 살아 있는 정체성이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삐딱한 해석의 시선은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과 ‘학교 급별 교육 목표’로 이어지면서 더 강해지고 굳어졌다.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 전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역량 함양”,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 등이다. ‘중점’ 사항 첫 자리에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따른 선택학습 강화”가 나온다. 사회가 요구하는 쓸모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각자 자기 갈 길을 선택해 그 길을 따라 한 눈 팔지 말고 가라는 것이 아닌가.


아름답고 긍정적인 말들 속에 ‘음모’의 가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났다. 마치 <교육과정>이 “깜냥껏 자기 자리를 찾아 그곳에서 꼼짝 말고 살아가라. 끝없이 노력하라”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학교 급별 교육 목표’ 첫 자리에 나오는 내용들도 그랬다. “꿈을 키운다”(초등학교), “삶의 방향과 진로를 탐색한다”(중학교), “평생학습의 기본 능력을 기른다” 들이다. “자신의 소중함을 알고”(초등학교), “자아존중감을 기르”며(중학교), “성숙한 자아의식과 바른 품성을 갖추”는(고등학교) 등의 ‘나’를 위하는 교육활동이 이들과 병행하기는 한다. 그런데 난데없는 음모론에 휩싸인 내게는 그것들(‘나’를 위하는 교육활동) 모두가 상투적인 장식구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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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터 잡은 내 문제제기를 두고 선생님들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음모론’이 과잉 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자.


‘추구하는 인간상’의 전문에는 <교육기본법> 제2조에 있는 ‘교육 이념’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음모론’의 시각에서 행한 해석은, 실상 이 교육 이념에 따라 ‘중립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내용 순차나 체계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바라본 결과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일면 그렇게 볼 소지가 없지 않다. 핵심 역량 여섯 가지나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 여섯 가지, ‘학교 급별 교육 목표’에서 학교 급별로 네 가지씩 정리되어 있는 교육 목표 들을 보면, 교육 이념에 따라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제시해 놓은 ‘자주인’, ‘창의인’, ‘교양인’, ‘민주시민’의 내용 특성에 맞게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체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끝까지 모종의 ‘음모론’을 강조했다. ‘자기관리 역량’과 ‘꿈’과 ‘진로’와 ‘적성’ 들에 관한 내용들이 각 항목들의 맨 첫 자리에 놓이는 것 자체가 이들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에 따라 정작 최종적으로 중시되어야 할 ‘민주 시민’과 관련된 교육 활동의 취지와 의미가 퇴색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들을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자기를 관리하고, ‘꿈’과 ‘적성’과 ‘진로’의 틀에 맞춰 ‘평생 학습’을 멈추지 않으며 살아가야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리되는 인간상’이 이들 음모론자들의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것.


‘음모론’은 근거 없이 떠올린 단어가 아니다. <교육과정>을 읽으면서 박남기 광주교육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5・31 교육개혁 정책선도자(policy entrepreneur)가 바라본 개혁 실패 요인과 교육개혁 향후 방향 분석>이라는 글에서 전해주고 있는 5・31 교육개혁 방안(아래 ‘5・31 교육개혁안’)에 얽힌 어떤 일화를 떠올렸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그 일화를 말해 주었다.


5・31 교육개혁안은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끈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교육개혁위원회(아래 ‘교개위’)가 만들었다. 현행 <교육과정>의 이념적 뼈대가 이 5・31 교육개혁안에 닿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교개위에서 5・31 교육개혁안을 만들 때, 5・31 교육개혁안 마련의 핵심 주체로 알려져 있는 박세일 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과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당시 교육개혁위에서 ‘소비자’라는 용어를 강력하게 고수하고자 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용어는 최종 결정 단계에서 채택되지 못하고 ‘수요자’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교육계 소속 위원들이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5・31 교육개혁안 마련에 참여한 김신일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2015년 5월 9일 교육행정학회 세미나 기조강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정책이나 제도 입안을 위해 준비 보고서에 집어넣을 용어 하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일은 예사로 일어난다. 용어 여하에 따라 사고의 회로와 프레임이 특정하게 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관리’나 ‘꿈’이나 ‘진로’나 ‘적성’과 같은 말들이 작금 학교 현장을 지배하게 된 것 역시 <교육과정>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취지로 재삼 ‘음모론’을 강조했다. 과잉 해석이라며 일축하던 선생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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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는 ‘curriculum’이다. 이 말은 원래 경마 경기에서 경주마가 달리는 경주로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제시한 ‘음모론’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교육과정>은 일정한 틀과 경로와 과정을 전제한 교육 활동을 강조한다. 내용 순차나 체제를 단순하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현행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인간상이나 핵심역량의 내용 순차에 대한 내 해석이 지나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들이 ‘나’(개인)에서 시작하여 ‘우리’(공동체)로 귀결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고 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실제 <교육과정>에 따른 교육 활동이 ‘나’를 인정하는 ‘우리’, 개인이 살아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기관리’와 ‘꿈’과 ‘진로’와 ‘적성’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오늘날 학교교육을 둘러싼 담론을 보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 힘들다. 학생들 각자의 ‘자기관리’는 협소한 시선과 전망 속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꿈’과 ‘진로’와 ‘적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정체불명의 ‘능력’에 따른 성적 경쟁의 결과가 학생들의 ‘꿈’과 ‘진로’와 ‘적성’의 색깔을 결정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살았던 존 듀이(1859~1952)는 학생들의 “예측된 운명(probalbe destinies)”과 학교의 “걸러내는 기능(sorting)”을 반대하였다.[넬 나딩스(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259쪽] 그러나 불행하게도 20세기를 지나오면서 학교는 학생들을 사실상 걸러내는 선별작업에 관여하고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학생들의 ‘꿈’과 ‘진로’가 결정되고 있다는 작금의 우리나라 학교 현실이야말로 그 생생한 방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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