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1인칭의 글쓰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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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 <오마이뉴스>에 글을 줄기차게 써 올렸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며칠 뒤부터 시작한 글쓰기였다. 남 보기에 ‘미쳤다’고 말할 수준이었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고,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았다. 폭풍의 글쓰기는 한바탕 징계 활극과 함께 그 기세가 수그러졌다.
수년이 지난 지금 그때 쓴 글을 읽을 때가 있다. 나는 얼굴이 홧홧거려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렇게 정색하고 쓴 글이 내 손끝에서 나왔나. 그때 나는 또 왜 그렇게 고고하고 도도하고 잘난 체하는 논평가가 되어 있었나.
몇 년 전 언젠가였다. 내가 창공에 뜬 독수리 시선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에 쓴 글을 찬찬히 새겨가며 읽었다. 얕은 분석안으로 설익은 논평을 내놓으면서 온갖 물정에 밝은 체하는 헛똑똑이 한 사람이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거만하게 좌정해 있었다. 화들짝 놀랐다.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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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비판께나 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세운 잣대가 얼마나 적절한가는 중요치 않았다. 때로 냉소적으로 조롱하거나, 때로 애써 질시 어린 시선을 숨기며 훈계하듯 위선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그때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와 똑같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사람’임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남을 비판하거나 냉소하며 조롱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창공에 뜬 독수리의 시선을 갖고 세상 일을 바라보면 내가 어느새 초월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근거 없는 내적 충일감이 가슴에 그득그득 차오른다. 단어들이 거칠어지고, 문장과 문장을 따라가는 숨결이 시나브로 가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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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그때 내가 취한 시선은 일종의 3인칭 시점이었다. 그것도 매우 전지적인. 언필칭 신의 시점이므로 전능과 기개에 터 잡고 있어야 했건만, 오히려 어떤 두려움, 달리 용기의 부족에서 비롯된 시선이었던 것 같다.
역설적이지만 진실은 주관적인 1인칭의 시선 안에 있다. 객관과 중립으로 무장한 3인칭은 기만이다. 나는 문장에 일인칭의 ‘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내 글쓰기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고 자위했다.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얕은 꾀였다.
문장에 일인칭의 주어만 내세우면 되는가. 기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장은 일인칭 서술문이다. “노인이 죽었다”라는 문장은 “‘나’는 노인이 죽었다고 서술한다”의 변형문이다. 중요한 것은 문면의 ‘나’가 아니다. ‘나’의 위치, 시선, 의식이다. 나는 어느 곳에 서서 어떤 시선으로 그 누구나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분석하고 평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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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선적인 속임수는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로 인한 것인 듯하다. 내 글이 대상으로 삼은 그 모든 누구/무엇들과 얽히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그러나 종종 두려움은 실제 두려움과 무관하다. 두려움의 대명사 같은 진짜 뱀파이어(흡혈 박쥐)는 거의 무해하다고 한다. 그들이 한 번에 빨아들이는 피의 양은 우리가 헌혈로 기꺼이 내주는 피의 양의 20분의 1도 안 된다.
글쓰기의 두려움은 글쓰기의 두려움이라는 환상을 먹고 자랄 뿐이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용기는 환상에 불과한 두려움을 무너뜨린 곳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날카로운 지성과 유쾌한 풍자가 넘쳐나는 곳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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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디딘 땅에 굳게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진짜 1인칭의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