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지만, 질기고 길게 이어질 수 있는 희망의 길에 대하여
1
장관님, 저는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는 19년차 교사입니다. 새해 우리나라 교육정책 기조와 관련하여 한 말씀 드리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저는 어제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조그만 공간에서 열린 문화예술교육 관련 간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정부의 문화예술교육정책 실행을 위한 정부 출연 기관에서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이나 문화예술프로그램 활동 들에 참여하는 문화예술교육자들과 유관 분야 종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어제 간담회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문화비전 2030’에 따른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큰 기조가 기초 생활권 단위의 자율적이고 자생적인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로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존에는 상명하달 시스템에 따라 문화예술교육정책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방식이 기본 방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관님께서도 익숙하시리라 봅니다. 상!명!하!달!
저는 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들으면서 이와 같은 정부 문화예술교육정책의 기조 변화가 제도권 학교교육 시스템 안에 가져 올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고 창의적 체험활동이 확대되면서 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이 외부와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해가 갈수록 접면이 넓어지면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측면 모두 폭발적으로 노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정부의 문화예술교육정책의 기조 변화가 학교와 지역 공동체에 미치는 일정한 영향력과, 그에 맞춰 학교와 교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2
저는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눈 다섯 시간 동안 이와 전혀 다른 결과 색깔의 감정도 경험하였습니다. 어제 간담회는 기초 생활권 단위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칭)의 철학, 위상, 지향해야 할 가치와 목표, 구체적인 운영 방안 들을 제로 베이스 상태에서 자유롭게 그려 보자는 데 그 취지가 있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여차직하면 전국을 다니면서 릴레이로 이어지는 전체 간담회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 문화당국이 구상하는 그림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 정부를 ‘멘붕’에 빠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런 유의 ‘멘붕’이 진정한 혁신을 위한 창조적 혼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화당국에서 총괄하는 그와 같은 현장 의견 수렴 절차가 부러웠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이쪽 교육판에서 교육부 공무원들이 현장 목소리를 들으려고 얼마나 진정성 있게 노력하였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듣기 불편하실지 모르겠으나, 교육당국이 추진하는 공청회나 집담회나 간담회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교육 당국이 갖추고 있는 탁월한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교사를 패싱하면서 학교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책과 제도를 일사분란하게 도입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3
저는 학생들 사이를 비교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만, 국가 간 교육 시스템 비교는 좀 해야겠습니다. 장관님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핀란드 교육당국은 1960년대 이래 본격화한 교육개혁 추진 과정에서 항상 교사와 함께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국가교육과정을 마련하고 학교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교사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풀었다고 합니다. 전직 교사 출신으로, 1972년부터 1991년까지 20년간 핀란드 국가교육청장을 역임하면서 핀란드의 교육개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에르끼 아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가능하면 교육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개혁 과정에 초기 단계부터 교사들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교사들이 개혁 추진과정의 일부가 될 의지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부모들이 안심하고 교사들에게 자녀를 맡기고 교사들이 좋은 교육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신뢰의 바탕이 됩니다. 또, 부모들도 시간 날 때마다 교사들에게 연락하여 자녀에 대해 의논합니다. 정치인들 역시 교사들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학교에 예산을 제공할 때 교사들이 최적의 방법으로 예산을 쓸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단계에서 교직 및 교사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게 할 수 있으며,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 에르끼 아호 외(2010), 《핀란드 교육개혁 보고서》, 한울림, 269쪽.
4
핀란드에서는 교사들의 교원노조 가입률이 80퍼센트를 웃돕니다. 독일에서는 제15대 연방의회기(2002~2005) 시기 재적의원 628명 중 16.1퍼센트에 해당하는 101명이 교사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법조인 출신은 130명(20.7퍼센트)이었다고 합니다. 제16대 연방의회기(2005~2009)에서는 재적의원 614명 중 81명(13.2퍼센트)이 교사 출신이었느넫, 이는 법조인(143명, 23.3퍼센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중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 전공자 출신(28명, 4.6퍼센트)이었습니다. 교사들의 이와 같은 높은 정치 사회적 영향력은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등 정치 선도국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사들의 현실을 볼까요. 제가 속해 있는 교원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 벌판에 있습니다. 헌법노조이면서 법 밖에 밀려나 여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통탄스러운데, 한쪽에서는 전교조가 사회적 강자라느니, 전교조 때문에 진보적인 교육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느니 하는 기막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교무실에 삼삼오오 모인 교사들은 올해 사리가 몇 개 더 생겼느니, 부처님 세 분까지 모셔야 무사히 퇴직할 수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저는 그들이 그저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그런 말들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교와 교사는 지금 정신적으로 심각한 과부하 상태에 있습니다.
5
저는 1949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 학교와 교사가 복잡한 행정 파이프 라인의 말단부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봅니다. 장관님이 이끌고 계시는 교육부는 <민주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한 종합계획>까지 만들어 가며 자율과 존중과 연대를 실천하는 민주시민 양성 교육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학생과 교사가 민주시민으로서 누려야 하는 정치,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장관님도 동의하시리라 보는데, 우리나라 정부 당국자들은 무슨 무슨 종합 계획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인권교육 종합계획도 나왔더군요. 종합 계획을 세웠으니 종합적으로 부족한 점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또 과문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교육부만 놓고 보더라도 교육 분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들에 과도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학교와 교실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호소하거나 분노하듯 토해 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차갑게 외면합니다. 그곳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고, 피를 토하듯 절규해야 잠깐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리고, 학교와 학생과 교사는 원래 모습 거의 그대로 정물처럼 살아갑니다.
교육 문제가 그럴싸한 종합 계획이나 학교 밖 전문가들의 화려한 처방전이나 정치권력의 힘에 의해 손쉽게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놀랍게도 교육당국이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려할 만한 그런 방식에 따라 한사코 교육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5
최근 장관님이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라면서 교사의 전문성 지원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말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그것은 생략하고, 장관님이 하시겠다고 한 그 노력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학교 현장으로 가십시오. 가서 교사들에게 들으십시오. 다수의 교사들이 아니라고 하면 조금 ‘멘붕’이 오더라도 창조적 파괴의 기회라 여기고 과감히 그들의 말을 듣는 용기를 보여 주십시오. 저는 그들 교사에게, 희미하지만 질기고 길게 이어질 수 있는 교육 희망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학생과 더불어 교육의 핵심 주체입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9년 1월 4일 정은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