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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12. 2019

글쓰기 신화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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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게 힘들어요. 글을 쓰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교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글쓰기를 해 보자고 제안하면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이 많다. 나는 교사가 교육자로서 책 읽기와 글쓰기를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책 읽기나 글쓰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사정이나 배경을 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교육’보다 ‘행정’이 우선시된다. 학교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은 한가한 선비 놀음 정도로 치부되기까지 한다.


나는 저 말에 담긴 속뜻의 절반 이상이 겸양이나 반어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교사들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 교실 칠판 앞에서 분필을 쥐고 수업을 하고, 교무실 책상에 앉아 책이나 학생들 공책에 무엇인가를 써 넣는 교사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본디 교사는 말과 글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이다. 말과 글은 교사가 자신의 교육적 과업을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단이다. 교사가 칠판에 판서하는 교과 내용과, 학생들의 학습지나 활동지에 짤막하게 써 주는 메모와, 학교생활기록부에 남기는 문장들은 교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교육 활동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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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교사들은 자신의 말하기와 글쓰기에 만족하는가. 나는 적지 않은 수의 교사가 ‘그렇지 않다’며 한숨을 내쉴 것이라고 본다. 교사들은 종종 ‘요즘 아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들과 대화하는 일을 힘들어 한다. 교사들은 다른 여느 직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오래된 편견을 갖고 있다. 교사들을 둘러싼 교육 환경이나 분위기가 그들이 차분하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을 어렵게 한다.


글쓰기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천성적인 감각이나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나 하는 예외적인 일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글쓰기 신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대전제와 소전제가 되어 나오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글은 아무나 쓰지 않는다. 글쓰기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이 논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고 익숙하다. 글쓰기는 나와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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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와 같은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인의 상식과 감수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천재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탁월한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무장한 그들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감과 자극을 준다.


그렇지만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또는 범인(凡人)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천재라고 불리는 작가들 역시 처음에는 글쓰기의 범인에 불과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범인은커녕 작가로서의 타이틀을 얻을 가망성이 거의 없는, 형편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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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쓰기를 향한 사람들의 유별난 시선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크다. 인간 문명이 태동한 이래로 사람이 문자를 다루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대 시대에 문자와 글은 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였다. 고대인들은 말을 신이 인간에게 건네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제사장들의 신탁(信託)은 언어의 주술성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표였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는 인간에게 말을 만들어 주었다고 전해지는, 따오기 새의 머리 형상을 한 지혜의 신 토트(Thoth)가 있었다. 중동의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글을 새기는 데 쓰이는 진흙 서판이나 철필을 자신의 상징물로 거느리는 나부(Nabu) 신이 등장한다.


근대 이전까지 문자를 다루거나 글을 쓰는 일은 특별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글을 배우거나 쓰는 일 자체가 특권 계층으로 오를 수 있는 사다리 구실을 하였다. 수메르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가 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 따르면 고대 수메르 학교의 졸업생 대다수가 신전과 왕궁에서 점토판에 글자를 새기는 일에 봉사하는 필경사(筆經士)들이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수메르 점토판 기록에 등장하는 필경사들의 아버지는 총독, 도시의 지도적 인물, 대사, 신전 관리자, 군대 지휘관, 사제, 고위직 세금 관리, 감독관 등 사회의 유력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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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했다. 문자는 귀족이나 양반이 독차지했으며,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이 문자를 배우는 일은 엄격하게 제한되었거나 철저한 금기 사항처럼 엄수되었다. 우리는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꽃을 피운 과거 제도가 당시 사회 곳곳에 숨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수단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과거 제도가 글쓰기를 매개로 특권층들만의 ‘이너 서클’을 강화하는 합법적인 장치였다고 이해한다.{주 1}


15세기 중반 조선의 군주 세종은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호ᇙ 배 이셔도 마참내 제 쁘들 시러 펴디 몯할 놈”이 많아 “이랄 어엿비 너겨”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 왕조 국가의 절대 군주가 야심차게 추진한 기획이었는데도 보통 사람들이 글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자와 한문을 유일무이한 기록 수단으로 생각한 당시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암클’(여자들이 쓰는 문자)이니 ‘중글’(스님들이 쓰는 문자)이니 하는,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에 붙여진 별칭들은 문자와 글이 특정 계급의 사람들에게만 전용되었던 시대의 슬픈 초상화였다.


{주 1}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대한민국史》에 따르면 조선 시대 500년 간 문과에 합격한 이가 1만 5000명이었으며,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이 750개 정도였다. 그런데 전체 75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하위 560개 씨족 출신 급제자 비중은 10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상위 36개 씨족 출신 급제자 수는 50퍼센트에 달했다. 과거 급제자를 대규모로 낸 씨족 분포를 살펴보면 조선 왕실의 종친인 전주 이씨가 873명으로 가장 많았다. 명문 권세가의 대명사 격인 안동 권씨, 파평 윤씨, 안동 김씨가 각각 359명, 332명, 315명으로 뒤를 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간 200명 이상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 수는 14개 정도였다. 이는 중국 명․청 시대 과거 급제자 5만 1695명 중 4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씨족이 거의 없었던 사실과 대비된다. 과거 응시가 기존 지배층이 사회 상층으로 진입하기 위한 추인 과정에 불과했으며,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환경에서 집중적으로 ‘글 공부’를 하는 것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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