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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04. 2019

시스템 안에 ‘나’가 있다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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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교사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이름이 붙은, 전라북도교육연수원에서 주관하는 한 직무연수의 운영 계획표를 보고 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글쓰기를 정식 직무연수 과정에 포함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넓게 살피는 수단으로서 글쓰기만큼 좋은 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교사가 학교에서 바람직한 교육 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나 태도를 기르는 준비 과정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계획표상의 ‘연수 목적’과 ‘연수 방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수 기획한 익명의 교육자는 “교사로서 자신의 교육적 실천에 대한 글쓰기”와 “글쓰기를 통한 자신의 삶의 성찰과 치유”를 연수 목적으로 제시하였다. 교육 결과가 아니라 연수생의 다양한 자기 경험을 연수의 주요 내용으로 삼고, 연수생이 선택하는 방식에 따라 연수 과정을 구성해 나가는 것을 연수 방침으로 정했다. 1팀 6~8인의 소규모 그룹으로 “글쓰기-나누기-삶 보기”의 순환 실행 연수로 진행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방적인 강의 중심의 촘촘한 계획표에 따라서가 아니라 연수생들의 요구와 계획을 바탕으로 연수를 구성하고 실행하는 시스템은 현장 교사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바였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직무연수의 전체 시간은 30시간이었다. 3시간짜리 강의 3회, 3시간짜리 워크숍 2회, 실행(모둠별 글쓰기와 합평) 15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행 과정 15시간은 연수에 참여하는 교사들로 이루어진 모둠 단위별로 진행될 것이다. 모둠별 글쓰기와 합평이 주요 내용이니 연수생 각자 글을 써 와서 돌려 읽은 뒤 서로에게 조언을 하는 방식을 쓸 것이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직무연수는 4개월여 남짓 되는 기간에 진행된다. 꽤 긴 시간이다. 연수 영역도 ‘전문영역’으로 분류되어 있어 전체 진행 과정의 질적 관리가 상당한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연수에 참여하는 교사들 역시 기대감과 책임감을 갖고 임할 터이므로 연수 성과가 높게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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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쓰기 직무연수 계획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연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실행 과정이 얼마나 짜임새 있게 진행될까. 합평 과정에서 글을 통한 깊은 사색이나 성찰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기교적인 측면에 치우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 애초 연수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을까.


약간의 아쉬움과 불편함도 느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의 ‘가꾸는’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가꾸다’라는 동사는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보살피고 꾸려 가다”라는 뜻이 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가꾸는 과정은 가꾸려는 대상을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 의지 같은 것들을 우선 전제한다. 그렇다.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다.


요컨대 나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직무연수가 우리 사회에 가득 찬 ‘개인 환원론’의 세련된 버전처럼 다가온 것이다. ‘나’를 돌아보고 바꾸라, 그러면 ‘나’의 삶이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이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바뀌지 않으며, 우리가 각자의 삶에만 집중하면 할수록 각자도생의 지옥도가 펼쳐진다는 것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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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런 지적이 근거 없는 감정적인 비난이나 성급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교사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직무연수가 전라북도교육연수원이 모처럼 교육적 의미를 깊이 고려하여 개설한 연수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나는 공적 기관인 연수원에서 교사들로 하여금 글쓰기를 통해 각자의 교육적 실천을 돌아보게 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뜨거운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기본적으로 매우 ‘사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며, 공적인 글쓰기는 정해진 규정과 격식에 맞춰 이루어지므로 특별한 교육이나 훈련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교사의 글쓰기의 어느 한 측면에 공적 성격이 반드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학교 교사라면 더욱 그렇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조차 사사로운 감정과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부모는 자녀가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집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전통이나 사회에서 바람직스럽게 생각하는 가치를 내면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가정교육이 되었든 다른 어떤 교육이 되었든 일련의 행위나 과정이 교육으로 간주되는 한 거기에는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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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학교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되는 공공 자금으로 운영되며, 학교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성장하고 발달하여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과 태도를 기르는 일을 매우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학교 교사는 적어도 명목상 국가교육과정을 실행하는 공무 수행자이자 개별 교과교육과정을 최일선의 학교 현장에서 구현하는 일을 하는 공교육 실행자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기 수련 과정에서 글을 쓸 때 자신의 글이 갖는 공적 차원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앞 글에서 ‘나’와 ‘우리’의 관계 문제를 거듭 이야기하였다. 이를 이어받아 교사의 글쓰기가 공적 측면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려고 한다. 교사는 교육의 문제를 최초에 ‘나’의 차원에서 고민하되 ‘너’를 포함하는 ‘우리’와 수많은 우리들의 존재 조건을 규정하는 교육 체제(구조)의 문제로까지 확장해 바라보아야 한다.


‘나’ 이야기가 진정 의미와 가치를 갖고,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과정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나는 교사들이 ‘나’를 말하면서 ‘너’를 이야기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미치는 범위를 더 큰 ‘우리’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체제나 구조나 시스템의 문제를 더 깊이 직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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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직무연수를 적극 지지한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연수에 참여하는 교사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가꾸는” 데서 나아가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를 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 ‘나’를 전제로 하되, 그런 ‘나’의 의식과 존재를 규정하는 체제의 표면과 이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글을 쓴다는 의미다.


파커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훌륭한 가르침은 언제나 상호 연결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교사의 훌륭한 글쓰기가 ‘나’와 ‘우리’와 시스템이 서로 연결되면서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배제되지 않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와 ‘우리’가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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