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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14. 2019

그곳에 글이 있다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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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여성이나 노예(종)가 글을 배우는 일을 금기시했던 이유가 글쓰기의 전복적인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여성이나 노예가 스스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여성이나 노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1776년 조선의 제21대 국왕 정조가 당시 진보적인 조정 신료와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권력이나 권력자들이 글쓰기에 대해 갖는 엄중한 시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조는 고문(古文)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글쓰기 방식에 집착했다. 거기에는 유생들이 붓으로 쓰는 글자체의 모양까지 간섭했을 정도로 집요한 면이 있었다. 정조가 내세운 명분은 지난날의 순정한 문체 되살려 쓰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를 통해 문풍(文風)을 바로 세우고 나라 정치가 순리대로 풀리는 정세를 꿈꾸었다.


정조를 비롯한 문체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운 논리는 다음과 같다. 순수한 문체는 사람들의 정신을 순수하게 한다. 타락한 문체는 사람들을 타락하게 한다. 나는 정조가 글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글쓰기 문제가 단순히 문예 미학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념과 현실 정치 영역에까지 걸쳐 있을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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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너나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고, 쓸 수 있다. 글을 배우는 데 도움을 주는 보편적인 공교육 제도가 마련돼 운영되고 있고, 글쓰기를 실천하고 자신의 글을 선보일 수 있는 마당이 늘었다. 나는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간 인터넷 망이 결정적인 발화점이었다고 보고 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글쓰기 플래폼이 확대되면서 함께 글을 읽고 글쓰기를 공부하는 강좌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제목에 ‘글쓰기’를 단 책들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꾸준히 만들어지고 읽힌다. 이런 사실들은 그만큼 우리 주변에 글쓰기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일 것이다.


나는 글쓰기가 현대의 민주적인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를 살피게 하는 성찰의 도구로 쓰으면 좋겠다. 글쓰기는 생각하기를 전제로 한다. 생각하기는 우리가 하는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단초다. 우리는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나’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를 찬찬히 톺는다. 좋은 글쓰기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조그만 밑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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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우리가 결코 쉽사리 시도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좋은 글은 수공품 같은 것이어서 글쓴이의 생각이나 관점이 글 속에 분명하게 담겨 있다. 멋진 글은 통일성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체가 탄탄하게 짜여 있다. 무엇보다 훌륭한 글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래서 글쓰기 신화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쓰는 글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빼어난 문장으로 가득차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는 글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가 원하는 글은 영원히 신기루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성급하게 욕심을 내거나 지레 절망하지 말자. 글쓰기에 관한 한 우리는 타고난 글쓰기 천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의 소유자처럼 글을 쓸 이유가 없다. 처음부터 글을 완벽하게 잘 쓰는 사람은 없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빼어난 글쓰기를 유지하는 완전체형 작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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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글쓰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한 문장을 쓰고, 쓰고, 쓴다. 다시 문장을 쓰고, 쓰고, 쓴다. 이것이 글쓰기다. 글쓰기는 뒤 문장이 앞 문장의 꼬리를 물고 또 다른 문장을 토해 내게 하는 단조로운 반복 작업이다. 나는 글쓰기가 체력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한 루프처럼 이어지는 그 과정에 필요한 것은 천재적인 작가성보다 착석 상태를 지탱하는 튼튼한 허리와 엉덩이 근육과, 단조로운 손가락 운동을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의지다.


나는 당신이 글을 쓰기 위해 의자에 앉으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이 이미 글쓰기의 절반 지점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의자에 앉아 첫 문장을 썼다면 당신은 글쓰기의 나머지 절반 중 절반 지점에 도착했다며 자부해도 좋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시작이 반’인 상태를 벗어나는 경험을 수없이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잘 쓰는 일을 고민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우리는 머리로만 글쓰기를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한결같이 글을 쓰고 싶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쓸 수 없다고 말하거나, 자신이 글을 쓸 능력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나는 전형적인 글쓰기 신화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작가 은유가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재치있게 한 말을 들려 드리고 싶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은유는 이 둘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기분이 삼삼해지는 일이고 하나는 몸이 축나는 일이다. 주변에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글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장 좋은 글쓰기 비법은 자리에 앉아 곧장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글쓰기 강좌와 글쓰기 책과 유명 작가의 조언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글을 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나 능력을 갖춘 뒤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으며, 써야 한다. 글을 쓰기를 원하면 글을 쓰라. 글쓰기는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나는 그것이 민주적인 글쓰기, 또는 글쓰기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기분이 삼삼해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만 머무르는 것 같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몸이 축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분이 삼삼해지는” 일인데도 선뜻 글쓰기에 착수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몸이 축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6


글을 쓰고 싶어 하지만 글 쓰는 일을 어렵게 하는 더 근본적인 사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글쓰기가 밥벌이보다 생존하는 데 더 절박하거나 요긴할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밥벌이를 글쓰기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이나 연인과 영화를 보거나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은 글쓰기보다 훨씬 더 손쉽게 할 수 있는 교양 있는 문화 생활이다.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밥벌이에 집중하고, 마음의 교양을 수월하게 쌓을 수 있는 일에 눈길을 돌리다 보면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별개로 글쓰기가 계속 뒤로 미뤄진다.


그러나 글을 써 봐야 글을 쓸 수 있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물에 들어가 양팔을 휘두르고 두 다리로 허우적거려 봐야 한다. 나무에 오르는 법을 배우려면 나무 둥치를 안고 버둥거려야 한다. 수영하는 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교과서를 따라 맨땅에서 수영 연습을 한다고 수영을 배울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수영을 결코 익히지 못한다. 나무 둥치를 안고 나무 위에 오르는 기술을 익히는 데 나무 둥치를 안고 오르는 방법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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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제일 첩경은 글쓰기다. 글을 쓰는 것이 글쓰기고, 글은 써야 써진다. 종이 속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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