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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12. 2019

누가 왜 ‘더러운 일’을 하는가

메리토크라시 체제의 응분과 승복의 윤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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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임용고시(임고) 출신 정규직 교사와 비정규직 교사(기간제 교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전자는 시험이라는 경쟁의 장을 통과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하다.(대다수 기간제 교원이 학교 자체의 공개 경쟁 채용 과정을 거치긴 한다.)


입직 과정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 사실을 제외하면, 이 사실 이외에 이들 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차별적으로 대우해도 되는 근거는 없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정규직 교사와 비정규직 교사를 별종의 부류처럼 간주하면서 한쪽을 다른 쪽과 차별적으로 대하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내보이곤 한다.


입직 경로의 상이함이나 일상적으로 담당하는 직무와 적용 법규의 차이 등을 고려할 때, 학교 내 다종다양한 직급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크게 뭉뚱그려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학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두껍고 단단한 선을 그어 놓고 편견과 왜곡과 근거 부족한 부풀리기에 기반한 ‘인간 평가’를 내린다.


‘우리는 이래도 되지만 당신들이 그러면 안 된다. 당신들은 그럴 자격(능력)이 없다.’


2


마이클 영이 쓴 풍자소설 《메리토크라시의 발흥》(1954)에는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일(dirty work)’을 맡아야 하는 ‘개척단(Pioneer Corps)’이라는 단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낮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균질한 집단인데, 낮은 지능이 맡아야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성열관 경희대학교 교수는, 《비판적 실천을 위한 교육학》(이윤미 외, 살림터, 2019)의 <메리토크라시에서 데모크라시로: 마이클 영의 교훈>이라는 장에서 이 개척단의 사례를 들어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흔히 ‘실력주의’나 ‘능력주의’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원어 발음을 한글로 옮겨 쓴 표현을 그대로 쓴다.) 체제의 핵심 윤리인  응분과 승복의 윤리를 논한다.


이에 따르면 메리토크라시 체제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능력(지능+노력)에 따른 응분의 몫에 근거해서 분배되어야 한다.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더러운 일’을 하면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평등한 지능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메리토크라시 체제에 승복하기 때문이다.


3


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논의를 읽으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재지정 문제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이 자사고가 국가와 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인재나 리더를 양성한다는 명목으로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대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자사고 학생들은 사회 특권층에 편입하여 그에 합당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려도 되는 응분의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자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의 학생들은 특권의 범주와 무관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자사고와 자사고 학생들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전제되)지만 그 나머지는 그렇지 않으므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현실에 승복해야 한다는 논리가 통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합당한가. 성열관의 정리를 따라가면서 메리토크라시의 한계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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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응분의 몫이 정해져 있는가. 응분의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자격과 그에 합당한 응분의 몫도 기계적으로 일 대 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응분의 몫은 대개 시장의 수요-공급 곡선이 만나는 지점에 정해지는데, 이것은 시장이 정치를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응분의 몫은 시민적인 통제, 곧 사회 성원들이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둘째, 능력이 낮은 사람들은 능력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에 승복할 수 있는가. 또는 승복해야 하는가. 완전한 평등의 사회는 없으므로, 우리에게는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그러한 불평등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윤리가 필요하다. ‘더러운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것. 이 문제는 노동의 윤리적 측면으로 이어진다.


‘더러운’ 노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중략) 메리토크라시는 사회의 효율성이라는 공리를 위해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그것을 맡아야 한다는 윤리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더러운’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설사 가장 낮은 위계에 속한다 할지라도, 불명예까지 받아야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러한 노동이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계속 남아 있게 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비판적 실천을 위한 교육학》,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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