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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05. 2019

‘실력대로’라는 말에 대하여

1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학생들에게 하찮고 경멸스러운 보상들-‘참 잘했어요’라는 도장, 100점이라는 표시를 한 채 벽에 붙어 있는 시험지, A라고 쓰여 있는 성적표, 우등생 명단,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의 열쇠, 즉 간단히 말하면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좀 낫다는 저열한 만족감-을 장려하고 강요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그 의지를 꺾어버린다. - 알피 콘(2009),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88쪽.


배움에 대한 의지만 꺾었을까. 나는 점수와 성적에 집착하게 하는 경멸적인 평가 시스템이 지금 우리 가슴에 가공할 ‘괴물’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 괴물은, 다양한 재능과 특기와 능력이 있어 쉽사리 한두 개의 단편적인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우리 인간을 점수나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하게 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점수의 다과와 성적의 우열을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재는 척도로까지 활용하게 한다.


2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거친 언어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 중 핵심은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을 날로 먹으려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 비정규직들이 요구하는 것은 기본급 인상을 통한 공정 임금제 실현과 근속 수당 지급 등 정규직과의 차별 해소 같은 ‘처우 개선’ 사안들이다. 그들은 이를 난데없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로 성급하게 해석한 뒤 그렇게 억울하면 시험을 치러 공정하게 정규직이 되라고 일갈한다.



과문함 탓이겠지만, 나는 ‘공정하게, 더 공정하게’를 외치는 사람들(‘공정주의자들’이라고 하자.)이 재벌 그룹의 2세, 3세 세습 경영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공정이라는 말이 자주 기회의 공정성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가령 출발선의 평등의 끄트머리에도조차 끼지 못하는 사회적 최약자들을 손쉽게 배제하는 논리의 핵심어로 쓰인다는 것을 잘 모를 것이다.


3


공정주의자들은 대체로 노력 만능론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 개인이 실력을 기르는 데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가 실력을 형성하는 데 관여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노력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것들, 가령 타고난 재능이나 특성, 가정 환경(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 학교(교사), 우연히 만난 주변 사람, 행운 들은 실력 배양 과정에 노력보다 적은 영향력을 발휘할까.

    

나는 공정주의자나 노력 만능론자나 실력주의 만만세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실력대로’라는 말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 실력은 타고난 능력과 개인의 노력에 의한 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을 기본으로 그 공식을 ‘타고난 능력×{노력+교육(학교교육+사교육)+비실력적 요인(가정 배경+운)}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박남기(2018), 《실력의 배신》, 쌤앤파커스, 58~59쪽 참조], 실력 형성의 결과를 순수하게 개인의 노력의 결과나 개인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사태를 일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4     


시험을, 그리고 점수와 성적을 마치 ‘인간’ 대 ‘비인간’을 가르는 절대적인 보증수표처럼 받아들여 활용하는 사회, 흔히 ‘실력주의’나 ‘능력주의’라는 말로 번역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사회 체제의 말로는 퇴행적이다. 


《메리토크라시의 발흥(The rise of the meritocarcy)》(1958)이라는 책에서 메리토크라시라는 용어를 최초로 창안해 낸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능력이 상속되는 사회”로 예언하듯 묘사했다. 가문이나 혈통이나 계급에 따른 신분 세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택한 환상의 메리토크라시 체제가 실력 세습제 사회라는 디스토피아가 된 것이다.


60년 전인 1958년 머나먼 이국땅 영국의 한 사회학자가 예언한 음울한 이야기는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산업화 초반 세습보다 교육이 지위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담당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는 직접 상속, 소득 양극화, 사교육 이용하기, 거주지 분화, 학교 서열화 체제 등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부의 대물림이 일어나고 있는[이윤미 외(2019), 《비판적 실천을 위한 교육학》, 살림터, 267쪽 참조.], 메리토크라시 사회의 한 표본이 되었다.



* 제목 커버 사진은 <한겨레> 2019년 7월 3일 자 기사(“자회사·무기계약직은 또 다른 차별”...노동자 6만명 광화문 운집)에서 가져왔습니다.

* 본문 중간 그림은 <한겨레> 2017년 6월 30일 자 ‘한겨레 그림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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