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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14. 2019

올바른 일을 하는 것, 일을 올바로 하는 것

교사의 무기력과 학교교육의 목표 전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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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교과’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아울러지는 교육과정상의 학습 주제는 열 가지다. 안전과 건강, 인성, 진로, 민주시민, 인권, 다문화, 통일, 독도, 경제와 금융, 환경과 지속가능발전 교육 들이다.     


김용 청주교대 교수가 쓴 《학교자율운영 2.0.》(2019, 살림터)을 보다가 이들 범교과 학습이 창의적 체험활동(창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초등학교가 86퍼센트, 중학교가 101퍼센트, 고등학교가 76퍼센트라는 사실(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교육정책연구소, 2016)을 알고 놀랐다. 창체 전체 시간을 10시간으로 잡았을 때 중학교에서는 10시간 전체를 범교과 학습 주제로 채워 넣고도 0.1시간이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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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체는 자율 활동,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진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부 지침에 따라 반드시 실시해야 해서 “시켜서 하는 창체”를 뜻하는 ‘시체’가 들어간 “창체는 시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그 전에 이런 표현을 들은 적이 없지만 실제 창체가 ‘시체’처럼 운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릎을 세게 치며 공감했다. 그런 마당에 창체 시간 대부분이 정부의 또 다른 규제 항목이랄 수 있는 범교과 학습 주제로 채워져야 한다. “창체는 시체”라는 표현이 교육 호사가의 말장난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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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교과 학습 주제 교육은 법률의 구속을 받는다. 준법정문서 같은 <초․중등학교교육과정>의 ‘학교 급별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기준’에 따르면 범교과 학습 주제는 교과와 창의적 체험활동 등 교육 활동 전반에 걸쳐 통합적으로 다루도록 규정되어 있다. 학교와 교사는 범교과 학습 주제를 자신들의 교육과정 안에 포함하여 실시해야 하며, 심지어 지역사회나 가정과 연계하여 지도할 수 있다.     


만약 어느 중학교 교사가 학생들이 ‘창의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열 개의 범교과 학습 주제를 제외한 다른 주제를 대상으로 자신의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싶어한다고 해 보자.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주어진 창체 시간이 이미 범교과 학습 주제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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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니, 나는 당신이 학교 교사가 아니라도 창체와 범교과 학습 활동이 어떻게 굴러갈지 어느 정도 짐작하리라 믿는다. 우리나라 학교와 교사는 대체로 필요 이상으로 성실하고 순종적이어서 법률이나 당국의 지침을 잘 따른다. 그들은 학교교육과정의 조그만 틈을 비집고 들어가 창체의 네 영역과 범교과 주제 열 가지를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활동들을 현란하게 풀어 놓는다.    

 

다만 나는 그것들이 문서상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교와 교사는 법률적 의무를 다하면서 책임감으로부터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는 명목을 얻는다. 이는 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무책임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언컨대 스스로 기획하지 않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틀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만 적당하게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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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일상적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전달되는 전도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한 질주로를 달려간다. 그들은 학교생활기록부의 ‘체육대회’와 ‘체육행사’ 표기를 놓고 격론을 벌이면서 정작 그것을 왜 집어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속시원하게 내놓지 못한다. 법률에 따라 규제되는 갖가지 교육 활동을, 문서상 성실하게 수행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실천의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무책임의 즐거움(?)을 누린다.     


올바른 일을 하는 것(do right thing)과 일을 올바로 하는 것(do thing right)은 다르다. 나는 미국 교육행정가 T. J. 세르지오반니를 따라 오늘날 학교에서는 전자가 후자에게 밀리면서 학교를 개선하고자 하는 ‘계획’이 이미 학교가 개선된 ‘징표’로 활용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창체 계획이 창체 활동의 성공을 보증한다. 범교과 주제 계획이 범교과 활동이 성실하게 수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훌륭한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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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무기력에 빠진 노동자들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처신한다.”라고 말했다. 무기력에 빠진 채 전도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로매진하는 우리 교사들이 딱 그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올바른 일보다 일을 올바로 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교사들의 종착점이 어떤 곳일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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