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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17. 2019

‘놀이’와 ‘일’이 교육에서 중요한가

존 듀이의 ‘능동적 교육활동’의 의미와 철학적 정당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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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에서 듀이는 아동(학습자)의 경험과 능력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주창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듀이는 아동이 직접적으로 활동하면서 교육 사태를 경험할 수 있다며 놀이와 일을 매우 강조하였다.


듀이는 교육에서 아동의 능동적 활동 측면을 중시했다. 아동이 놀이에 참여하고, 직접 일을 함으로써 지적 성취 도달과 사회화된 성향 획득이라는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놀이나 일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교육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다는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철학적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듀이에게 놀이나 그와 비슷한 활동은 심심풀이용이나 시간 때우기용 교육 소재가 아니다. 듀이는 정신활동에 관한 당대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원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민주주의와 교육》 303쪽 참조) 이에 따라 놀이와 일의 바탕에 내재된 탐색하기, 도구와 자료 조작과 만들기, 감정 표현하기 등의 ‘생득적 경향성’이 근본적인 가치를 갖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능적인 경향성에 의하여 일어나는 활동이 정규 학교 공부의 한 부분이 될 때, 학생은 전인적으로 여기에 전념하게 되고, 학교 안에서의 삶과 학교 밖에서의 삶 사이의 인위적인 간극이 좁아지며, 특이하게 교육적 효과를 가지는 온갖 자료와 과정에 주의가 집중되고, 정보와 지식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협동적인 교섭이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교육과정에서 놀이와 일에 결정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잠정적인 편의나 순간적인 기분전환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지적, 사회적 근거에 의하여 당연히 취해져야 할 조치이다. - 존 듀이(2008), 《민주주의와 교육》, 교육과학사, 304쪽.     


듀이는 놀이와 일이 바람직한 정신적, 도덕적 성장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학교의 과업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놀이와 일이 지적 결과와 사회화된 성향이라는 교육의 목적에 부합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가.


듀이가 개진하는 논리 속 사례(311쪽, 교육적으로 통제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정원 가꾸기나 식물 기르기 사례)를 통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학생이 직접 식물(완두콩 기르기)을 기른다. 그 과정에서 식물의 성장 과정, 토양의 성질, 외적 환경(햇빛, 수분, 공기), 관련 동물 들을 알게 되고, 식물 기르기가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 성숙해지면 식물에 관한 더 의도적이고 지적인 탐구 단계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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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식의 논리와 사례가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홍우 교수가 주석(311쪽)에서 제기한 의문처럼, 식물을 키워 보면서 식물의 식생 시스템을 아는 것이 나아 보이는 것과 별개로 그 일이 아동의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성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듀이는 교육자가 이른바 ‘능동적인 작업활동’(놀이와 일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할 때 그것이 지적 결과와 사회화된 성향 형성이라는 교육 목적에 종속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기정의 틀에 따른 경직된 활동이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원자료가 아니라 가공된 자료를 활용한 활동, 작업 자체에 몰두함으로써 ‘전체’(관심이나 흥미와 관련되는 질적인 것)가 무시되는 활동 등을 경계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거듭 암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면의 의미가 있다. 교사의 별다른 통제나 계획 없이 학생이 일이나 놀이 자체에 참여하기만 하면 아동이 자료를 지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되고, 그 결과 상기한 교육 목적이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러한 상황이 가능한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그것(교육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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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은 아동 중심, 경험 중심, 활동 중심의 교육 과정이나 방법의 ‘정당성’ 을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를 좀 더 확장하여 오늘날 우리 현실에 연결해 보면, 학생의 경험, 놀이와 일, 활동 등에 방점이 찍힌 혁신 교육 활동의 정당성 문제, 경험과 활동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 교육은 언제 하냐는 문제제기, 학생의 생활 경험과 활동 중심 교육이 학력 하향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비판 들과 중첩된다.


교육활동의 정당성에 대한 논변의 고전적인 사례는 영국 철학자 리처드 스탠리 피터스가 쓴 《윤리학과 교육》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 제5장의 “가치 있는 활동” 대목에서 피터스는 시종일관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나 활동의 철학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놀이든 일이든 그것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면 우리는 그것들이 최대한 최선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피터스는 이와 같은 정당화의 근거를 ‘욕구’, ‘쾌락과 고통’ 등에서 찾은 전통적인 관점을 살펴본 뒤, 교육과정상의 활동은 쾌락으로 분류되는 다른 활동들이 가지지 않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한 특징의 핵심은, 특정 활동의 (수단적이거나 기술적인 가치가 아니라) 내재적 가치 여부에 대한 판단을 통해 결정된다. 피터스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왜 이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 관계와 목적 달성에 초연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을 때 몇몇 특정한 활동들을 선택하였다면 그 선택에 작용한 고려 사항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즉, 그 기준은 그 활동들 자체의 성격, 그리고 정연한 삶의 패턴 안에서 그 활동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모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 로버트 스탠리 피터스(2003), 《윤리학과 교육》, 교육과학사,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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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스는 “이해 관계와 목적 달성에 초연한 태도”를 ‘일반적인 태도’라고 명명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피터스가 규정하는 일반적인 태도의 핵심을 추적해 나가 보면 “이론적 탐구에의 의욕”, “진리 탐구에 대한 열망”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교육과정 활동들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활동’들이다. ‘심각하다’는 것은 무겁고 딱딱한 내용이나 주제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 빛을 던져 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터스의 관점을 기준 삼아 듀이의 능동적인 작업활동들이 갖는 정당성 문제를 판단하고 평가해 보자. 그것은 가치 있고 정당한 교육활동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경험과 실천의 사례가 이러한 질문과 관련된 이론적 탐색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면 사례의 어떤 측면들(활동의 종류나 유형 자체? 활동의 특성? 활동의 성과?)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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