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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24. 2019

교사에게 ‘독배’를 강요하는 매뉴얼 맹신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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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교육활동(수업)을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 넓게는 <헌법>과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 같은 기본적인 교육 관계 법규의 그물망 안에서 자신의 교육활동을 설계하여 실시해야 하며, 좁게는 준법정문서인 <국가교육과정>에서 규정한 수업 시수, 내용요소 들을 기준으로 매 차시 수업 내용을 선별하고 활동 계획을 세워 수행해야 한다.   

   

국가가 크고 작은 법망으로 촘촘하게 규정해 놓은 교육활동의 범위를 교사가 충실하게 지켰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교육활동의 전체 내용 구조와 맥락, 교사가 수업 중에 실시하는 설명의 문맥 등을 거세한 채 특정 표현이나 어구를 따로 떼내어 문제시하는 순간 그는 거의 자동적으로 부적절한 수업을 한 ‘문제 교사’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심각한 상황은 교사의 교육활동이 ‘성(性)’ 문제와 연루될 때 더 심각하게 펼쳐진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거의 빠지지 않고 실리는 고대가요 작품으로 <구지가(龜旨歌)>가 있다. 국문학계 일각에서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머리’를 남근(男根)으로 해석한다.(‘부적절한 학설’이니 ‘정설이 아닌 해석’ 등의 논란은 일단 차치하자.) 《문학》 교과 교사용지도서나 참고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교육과정상의 정식 내용 요소로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교과 내용 중 하나다.  

    

2018년 7월 인천의 모 사립여고에서 <구지가> 수업을 하던 중 ‘머리’에 대한 문학적 상징과 비유를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예의 ‘남근설’을 설명한 국어 교사가 성희롱 혐의로 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일부 여학생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으므로 징계 회부 사유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결국 그 교사는 최초 징계위에서 파면 결정을 받았다.(해당 교사는, 재단측의 징계 절차상 하자가 인정되어 재징계 절차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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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 국가교육과정에 따르면 ‘성윤리’ 단원은 ‘성과 사랑의 의미’, ‘성윤리’, ‘이성교제’ 등을 내용 요소로 한다고 한다. 이 단원은 중학교 《도덕 1》, 《도덕 2》 교과서에 실린 총 23개 중단원 중 하나로, 6~10시간 정도의 수업으로 구성된다. 이에 포함되는 세부 내용 요소로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성의 생식적 가치, 쾌락적 가치, 인격적 가치, 사랑, 성 상품화, 성적 주체성, 성적 자기결정권, 이성교제의 의미와 태도, 데이트 폭력 등이 있다.[아래 관련 수업 내용과 교육청 조치 경과 등에 관한 내용은 배이상헌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독배 메모, 독배 일기’ 등의 제목으로 올린 글들에서 가져왔다.]      


광주광역시교육청(광주교육청) 소속 효천중학교 도덕 교사 배이상헌 선생님이 중학교 《도덕 1》 교과서 ‘Ⅱ-3 성윤리’ 단원 수업을 했다. 배 선생님이 지레(?) 예측하는(교장, 교감, 교육청 성인식개선팀 장학사들 중 누구도 배 선생님에게 관련 비위를 뚜렷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래 관련 수업 내용은 순전히 배 선생님의 추측에 따른 것이다.) 관련 수업 내용과 그 이후 펼쳐진 상황을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배 선생님은 성윤리와 관련한 전체 3개 소단원 중 소단원 2에 포함된 ‘성적 주체성’과 ‘성적 자기결정권’ 의미를 학습하기 위해 3분 가량의 미국 동영상을 한국여성단체에서 재구성한 영상물(https://youtu.be/Ag4RTt9Dt0M)을 학생들에게 시청하게 했다.(나는 이 영상을 2년 전쯤 우리 학교 전체 교직원을 대상으로 실시된 교직원 성교육 연수 시간에 시청했다.) 이어 성적 주체성과 자기결정권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영상에서 ‘차를 마실래?’라는 말은 ‘나랑 섹스할래?’의 의미라는 것을 이해했나요?”라고 말한다. 한 학생이 배 선생님의 말 중 ‘나랑 섹스할래?’라는 말을 거두절미하여 불편함을 느꼈다면서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한다.


민원을 접수한 광주교육청은 일사천리로 업무를 처리했다. 7월 8일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비밀리에 실시하였다. 7월 10일 2교시경 학교장이 배 선생님을 교장실로 불렀다. 교사 수업 내용의 성비위를 지적한 학생의 설문 응답 결과를 근거로 광주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산하 성인식개선팀이 발송한 공문에 따라 가·피해자 분리를 위한 교사 수업 박탈, 배제와 경찰 수사 개시 사실을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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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육청이 배 선생님에게 내린 조치는 학부모 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민원 처리 절차는 일방적이었다. 사안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사실 확인 절차를 요구하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배 선생님에게 광주교육청 성인식개선팀의 담당 장학사는 “성인식개선팀은 피해학생을 위한 조직이므로 교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장학사가 했다는 이 말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광주교육청 조직도에 소개된 성인식개선팀의 업무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인식개선팀이 “피해학생을 위한 조직”임을 단정하게 하는 근거가 없다.     


성인식개선팀 담당자들은 배 선생님 자신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 일방적인 조사와 성비위 교사 확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배 선생님에게 “우리는 (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고 배 선생님은 추후 감사팀에게 의견을 진술하면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교사를 배제한 채 편파적이고, 보기에 따라 폭력적으로 비칠 수 있는 방식으로 민원 업무를 처리한 근거는 광주교육청이 마련해 운영하는 성비위 관련 업무 처리 매뉴얼이다.     


최근까지 펼쳐진 일련의 상황을 통해 매뉴얼 내용을 짐작해 보면, 수업 내용과 관련하여 성비위 수업의 당사자로 지목된 교사는 수업 배제와 직위 해제, 경찰 수사 의뢰 대상이 되는 것 같다. 학생이나 학부모 중 누군가가 특정 교사가 성비위 관련 교육활동을 했다고 민원을 제기하면 해당 교사는 무조건적으로 성비위 교사로 확정되어 일체의 교육활동을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배 선생님은 자신의 성비위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성비위 교사로 신고를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비위 확정 교사’가 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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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기관의 업무 매뉴얼은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목적으로 운용하는 실무 지침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매뉴얼이, <헌법> 제27조 제4항(“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헌법> 제31조 제4항(“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에서 명시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 보장 규정, <교육기본법> 제5조 제1항(“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보장하여야 하며”)의 교육의 자주성 규정에 반하는 업무 처리의 절대적인 준거가 되고 있다. 아이러니한 사태라 아니할 수 없다.     


<교원의 지위향상 및 교육활동보호를 위한 특별법 시행령>(<교원 지위향상 및 교육활동보호 특별법 시행령>) 제7조 제1항에 따르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교원에 대한 민원, 진정 등을 조사하는 경우에 관계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해 교원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하고,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그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인사상의 불이익한 조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동법 동조 제2항, 제3항에 의하면 민원이나 진정을 조사하는 경우 당해 교원의 수업활동을 존중하여야 하며, 교원의 정당한 교육활동이 부당하게 침해되거나 교육활동과 관련하여 교원에 대한 폭행, 협박 또는 명예훼손 등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관계 법령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 처리해야 한다. 굳이 시행령상의 규정에 따르지 않더라도,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절차에 해당한다.     


광주교육청의 성비위 관련 업무 처리 매뉴얼은 <교원 지위향상 및 교육활동보호 특별법 시행령>상 규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배 선생님은 지난 7월 15일 광주교육청의 조치를 교권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교권보호위원회 개최를 요청하였다. 7월 19일 열린 효천중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교원 지위향상 및 교육활동보호 특별법 시행령> 제7조에 의거 광주교육청이 내린 수업 배제의 구체적 사유와 근거 법령을 제시하도록 요청하는 학교교권보호위원회 심의(조정) 결과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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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학교장에게 학생들 공책 정리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이유로 ‘특별 면담’을 요청 받은 적이 있다. 그가 학생들 공책을 어떤 경위로 보게 되었는지 알 길 없으나, 나의 교육활동을 그 자신의 기준에 따라 함부로 재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 모욕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어느 교사는 수업 시간에 기독교에 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믿는 학부모에게 민원성 전화를 받은 교장과 실랑이를 벌인 일도 있다.


교사의 교육활동이 절대적인 성역에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문제나 오해 소지가 있고, 상례에 비추어 부적절한 교육활동이 있다면 정해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조사해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를 주면 된다. 다만 법령과 교육과정의 틀 안에서 교육 계획을 짜고, 이에 따라 충실하게 교육활동을 펼치는 교사를, 민원과 진정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직위에서 배제하고 형사 절차를 밟게 하는 지침은 법적 정의나 원칙 엄수의 측면이나 교육적 의미의 측면 모두에 비춰 보았을 때 매우 심각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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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육청의 성비위 관련 업무 처리 매뉴얼은 교육부의 관련 지침과 매뉴얼을 거의 그대로 준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018년 4월 교육부가 만든 <교직원 성 관련 비위처리 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성비위 신고가 들어오면 교원을 피해학생과 분리하기 위해 수업  배제, 연가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즉시 직위해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들 규정의 적용을 받게 된 교사는 구체적인 조사 과정을 거치지도 못한 채 ‘확정범’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게 현재의 시스템이다.


교육부와 광주교육청의 성비위 관련 업무 처리 매뉴얼은 <헌법>상 형사법의 대전제이자 최고 규범인 무죄추정의 원칙과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보장 규정, <교육기본법> 제5조의 교육의 자주성 규정에 반하는 반헌법적 무소불위의 악제다. 그것은 배이상헌 선생님이 표현한 그대로 그 자신의 교육자로서의 생명을 해치는 ‘독배’다. 배 선생님에게 독배를 건넨 이들은 기계적인 매뉴얼 맹신주의자들인 교육부와 광주교육청 담당자들이다. 나는 이들을 <헌법>과 <교육기본법>의 이름으로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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