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Jul 26. 2019

매뉴얼 맹신주의와 행동의 무능력자들

1     


3년 전 《관료제 유토피아: 정부, 기업, 대학, 일상에 만연한 제도와 규제에 대하여》(2016, 메디치)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대목은 관료제가 상상력을 질식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던 제1장(“상상력의 질식”)이었다.

    

저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 교수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상상력이 거세된 관료제적 형식성이 강요하는-글쓴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노예에게 채찍질을 하는 주인과 같은 의사전달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인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노예인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절대적인 복종이다’.     


2     


관료제는 특유의 경직된 절차성과 형식성으로 인해 상상력이 주는 대화나 생각의 여유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저자가 전하는 일화는 상상력이 사라진 관료화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어처구니없음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요양원에서 발작을 심하게 일으킨 자신의 어머니의 사회보장 증명서 대리 예탁을 하기 위해 은행에 가서 서류를 받아 요양원으로 간다. 그는 맨 처음 다음과 같은 공증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요양원 간호사(대면)→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전화 통화)→공증인(전화 통화)→사회복지업무 책임자(대면;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밝혀짐.)     


그러니까 그는 공증인과 사회복지업무 책임자가 서로 업무 협조만 원활하게 했면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되었을 과정을 몇 단계 더 거치면서 감정 소모와 시간 낭비를 한 것이다. 그렇게 된 한가운데 “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그에게 과실이 있다면, 자신이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이 조만간 직접 만나게 될 민원인일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어머니는 결국, 사회복지업무 책임자의 무책임과 공증인의 무능함과 은행 직원의 경직된 형식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탁상공론 와중에 몇 주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3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표준적인 절차와 형식을 정해 놓은 까닭은 단순하다. 그것이 없을 때 일 처리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기서 높은 업무 효율성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일의 정확성을 기하자는 데 있을 것이다. 부적절한 업무 처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선의의 피해자를 막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공공기관 실무 단위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매뉴얼의 존재 의의를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    

 

4     


나는 최근 중학교 1학년 도덕 수업 시간에 성윤리 교육을 한 광주 배이상헌 선생님이 제대로 된 조사 과정도 거치지 못한 채 ‘성비위’ 교사로 확정되다시피 하여 교육청으로부터 직위해제를 당하게 된 참담한 사태의 배경에 매뉴얼을 기계적으로 (잘못, 또는 거짓으로) 적용한 교육청 관료들의 상상력 부재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판단한다.     


배이상헌 선생님이 올린 글들을 종합해 보면, 광주교육청은 민원 대상이 된 배이상헌 선생님을 성비위 혐의로 수사기관에 수사 의뢰를 하고, 이를 근거로 직위해제 조치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조치 결정 과정이 미심쩍다. 이를, 교육부가 2019년 2월 펴낸 <학교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아래 ‘교육부 매뉴얼’)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5     


광주교육청이 교육부 매뉴얼을 그대로 따랐다고 전제하면(실제 광주교육청에서 별도로 작성한 매뉴얼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교육청 누리집 ‘자료마당’의 민주시민교육과 ‘부서별 공개자료실’에 가 보면 자료 번호 ‘174’에 교육부 매뉴얼이 그대로 탑재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치 결정 경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교육부 매뉴얼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성비위(성폭력, 성희롱) 사안 인지 및 접수 단계(제1단계)에서 수사기관 신고를 하게 되어 있다. 교육청에서는 이를 근거로 배이상헌 선생님을 성비위 대상자로 전제하여 수사기관에 수사 의뢰를 했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배이상헌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소명을 하거나 구체적인 조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교육부 매뉴얼 업무 처리 흐름도]

그런데 교육부 매뉴얼에 따르면 학교 내 성비위 사안과 관련하여 “사안을 해결하는 총지휘자”(매뉴얼 21쪽)가 학교장으로 되어 있다. 학교에서 성비위 사안이 발생하면 성고충 상담창구에 접수하고, 수사기관 신고 후 학교성희롱고충심의위원회에 사안을 넘겨 사안 조사, 보호 및 선도 조치, 전문 상담기관 연계 등의 조치를 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광주교육청이 (1)의 경로를 따라 배이상헌 선생님에게 수업배제를 지시하고 직위해제를 했다면 학교장의 성비위 사안 처리 권한을 침해한 것이 된다.    

 

(2) 두 번째 경로는 광주교육청이 사안을 신고, 접수받은 후 직접 처리하는 경우다. 이에 따르면 교육청에서는 신고, 접수 후 사안 유형을 분석해야 하는데, ‘교직원(가해자)-학생(피해자)’ 유형일 경우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여 담당부서 특별장학이나 감사관 감사 조치를 할 수 있다. 이후 사안결과보고 내용에 따라 인사처분을 의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교육청이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근거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교육부 매뉴얼에 따르면 ‘직위해제’는 성비위 관련 교직원의 사안을 처리하는 전체 5단계 중 4단계(심의 및 조치 결정)에서 성희롱고충심의위원회가 관련 교직원에 대해 내리는 8가지 조치 중 하나로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배이상헌 선생님은 이에 따른 조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광주교육청이 직권으로 내린 것으로 보이는 직위해제 조치를 받았다. 광주교육청이 ‘셀프’로 내린 수사 의뢰를 근거로 직위해제를 받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6     


광주교육청이 이번 사안을 인지하고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는 근거로 삼았을 만한 문구는 매뉴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혹시 <국가공무원법> 제73조의3 제1항 제6호(“성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위행위로 인하여 감사원 및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조사나 수사 중인 자로서 비위의 정도가 중대하고 이로 인하여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기대하기 현저히 어려운 자”)에 따라 직위해제를 했다면, (교육부) 매뉴얼에 따라 직위해제를 했다는 교육청의 말은 거짓이 된다.      


또한 <국가공무원법> 제73조의3 제1항 제6호에 따른 직위해제 대상자는 비위 정도가 중대하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기대하기가 현저히 어려운 자로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배이상헌 선생님의 경우 7월 25일 열린 학교성고충심의위원회 심의 결과 만장일치로 “성비위 아님” 결정이 나왔다.     


7     


나는 교육청이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개적인 교육활동 과정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사의 설명이나 수업 자료 활용이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섬세하게 조사하여 판단했더라면 지금까지와 같은 무리한 결정들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매뉴얼이나 현행 법률에 근거해 보더라도 성비위 관련 민원 대상자가 된 교사를 곧장 직위해제 상태로 내몬 것은 민주적이고 인권친화적인 업무 처리가 아니다.     


나는 교육청 담당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매뉴얼에 (거짓으로) 기댄 기계적인 업무 처리가 아니라 상상력에 바탕을 둔 공감과 충분한 대화여야 했다고 생각한다. 성윤리 단원과 관련한 교사의 교육활동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에 터 잡아 관련 당사자들에게 충분한 의견 개진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사태를 원만히 해결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광주교육청의 의사결정권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올바른 일을 하는 것(do right thing)’이 아니라 ‘일을 올바로 하는 것(do thing right)’, 곧 기계적인 절차에 따라 민원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에 그쳤다. 그마저도 매뉴얼 맹신주의에 빠져 매뉴얼을 꼼꼼히 살핀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참고 자료 정도로 활용되어야 하는 매뉴얼의 존재 의의를 망각한 채 무리수를 둔 쪽에 가깝다.      


8     


유태인 출신의 미국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내는 일을 섬세하게 처리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과정을 지켜본 뒤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말하기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나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 ‘생각의 무능’으로 인해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에 빠진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고 판단한다. 지금 광주에서 배이상헌 선생님이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깔려 있는 문제의 본질 역시 이와 관련된다.

작가의 이전글 교사에게 ‘독배’를 강요하는 매뉴얼 맹신주의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