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Aug 31. 2019

독수리의 눈과 벌레의 눈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6)

1


나는 앞에서 써야 써진다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이 글을 무턱대고 쓰라는 말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무턱대고 글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글을 쓰기 전에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한다. 이때 그 ‘무엇’은 글의 주제보다는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글에 담기는 어떤 것, 글 한 편의 속내를 꽉꽉 채우는 어떤 것들 말이다.


교실에서 학생들과 글쓰기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이 가장 자주 호소하는 어려움이 생각에 관한 것이다. 손에 쥔 볼펜을 신경질적으로 돌려 대고, 망망대해 같은 빈 칸 원고지를 한참 동안 쏘아 보던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한다. “선생님, 글을 쓰려고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요. 무엇을 써야 할지 생각하지 못하겠어요.” 이 가련한 학생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학생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한 편의 글을 써야겠다고 결정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글로 옮기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그 생각을 쓴다.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선뜻 쉽게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이 부족하거나 뚜렷하지 않다. 우리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생각을 생각하다 보면 글이 써진다.


2


생각을 생각한다는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일까. 우리는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주제, 의미, 동기, 목적 들을 구체화한 뒤 그것들을 구현할 수 있는 글감이나 소재를 선별한다. 그리고 내용들을 어떻게 순차적으로 늘어 놓아야 메시지(주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고심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각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곁길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강력하게 붙잡고 이끌어주는 지지대 구실을 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글을 쓰게 만든 최초의 ‘동기’다. 동기는 기본적으로 ‘왜 쓰는가’, ‘무엇 때문에 쓰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내가 컴퓨터 자판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도록 만들고, 손에 불펜을 쥐어 공책 여백에 문장들을 또박또박 새겨 넣게 만든 힘이 동기다.


3


최초의 글쓰기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글의 방향이나 주제가 좌우되고, 이에 따라 글의 색깔(기조, 어조)이 크게 달라진다. 어느 교사의 글쓰기 동기가 학교 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목격한 비민주적인 행태였다면, 그는 학교 민주주의나 의사결정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문제제기를 표방하는 글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학교 의사결정 시스템의 문제를 분석하여 대안적인 미래 방향을 제시하거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태도 변화를 주문할 수 있다. 


그가 쓰는 글은 공적 문제제기의 성격을 띠면서 차분하면서 분석적인 문체를 띨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느낀 불쾌한 심정을 표현하는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 배설 수준 이상의 글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글을 쓰기 전에 글 속에 담을 생각을 잘 풀어 가기 위해서는 글을 쓰게 만드는 동기를 잘 포착하는 감각을 키워 활용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국면이 글쓰기 동기가 될 수 있다. 특히 교사는 수업(교육 활동)이라는 일련의 사태 자체가 자주 역동성을 띠는 경향이 있으므로 글쓰기를 촉발하는 동기를 경험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동기 자체는 한 편의 글을 끄집어내 이끌어 가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나는 교사가 학교 안팎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교실에서 펼쳐지는 사태의 매 국면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시선을 갖추었을 때 글쓰기 동기를 더 구체화하고 생각을 자연스럽게 펼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때 중요한 것이 교사의 눈, 시선이다.


4


나는 교사가 갖추어야 하는 두 가지 상이한 시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감(鳥瞰) 시점’은 3인칭 전지적(全知的) 시점과 비슷한 것으로, 새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새가 아니라 다른 그 누구라도 세상 전체를 한눈에 속속들이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넓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 교사 자신이 내리는 판단이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니라 숲 전체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다.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때렸다. 우리는 가해 학생의 폭력적인 성향이나 평상시의 불량한 태도를 문제삼는다. 그럴 수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가해 학생이 평소 아버지가 자행하는 극심한 폭력 행위에 노출된 채로 살고 있었을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여기서 유서 깊은 교육학적 명제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학생이 교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책가방만이 아니다!


5


세상을 넓게 조망하는 조감 시점이 진실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교사가 자신을 둘러싼 넓은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좀 더 속속들이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때 교사에게는 벌레[蟲]가 눈 앞에 있는 대상을 자세히 보는[眸] 것과 같은 ‘충모(蟲眸) 시점’이 필요하다.


벌레는 직진하지 않는다. 벌레는 땅을 기어 갈 때 끊임없이 고개를 상하 좌우로 돌려 가며 주변을 둘러본다. 머리 위에 있는 풀잎의 부드러움을 가늠하고 오른쪽에 있는 조그만 돌멩이를 조심스레 살피며 찬찬히 지나간다. 벌레는 대체로 앞을 향해 가지만 때로 조용히 방향을 정반대편으로 바꾸기도 한다. 충모 시점은 숲만 보다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를 미연에 막아 준다.


주변을 끝없이 둘러보는 벌레처럼, 나는 교사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발걸음을 찬찬히 옮겨 가며 자신의 앞뒤와 좌우 주변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들에게서 각자의 삶의 역사와 이야기, 꿈과 욕망과 감정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조감의 시선 아래서 잘 보이지 않던 흐릿한 모습의 그들이 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6


나는 교사가 대범한 동시에 섬세한 시점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섣부른 삼인칭 전지적 시점은 의도치 않은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교사는 삼인칭 전지적 시점을 취하는 순간 오만으로 무장한 제왕이자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될 수 있다. 교사는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조감하는 전지적 시점의 주인공이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주변을 살피는 일인칭 시점의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자가 본질적으로 고독하게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는 실패(실수를 넣어도 되겠다)했으며, 실패하고 있으며, 실패할 존재다. 스스로 실패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교사는 실패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실패한 교사다. 그러므로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점은 시종일관 차분한 자기 겸손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교사로 하여금 글쓰기 동기를 포착하게 하는 민감한 감수성 역시 이와 같은 태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싸움의 전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