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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09. 2019

글쓰기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7)

1


글쓰기 동기가 강력하면 곧바로 멋진 글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조지 오웰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면 글쓰기를 향한 뜨거운 동기가 그 자체로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전제가 된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 조지 오웰(2010),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에세이》, 한겨레출판, 300쪽.


오웰에게 글쓰기 동기는 미스테리 영역의 일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귀신에게 홀렸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사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강타하는 글쓰기 충동이나 글을 향한 본능적인 감정의 꿈틀거림을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글을 쓰는 작가들이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며 게으르다는 말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웰의 저 문장들이 허랑한 과장법으로 만들어졌다고 간단히 무시하지 못하겠다.


2


문장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나 글 전체의 주제 의식이 조금 다르지만, 글쓰기를 ‘귀신’이 하는 일과 관련하여 생각한 이는 오웰만이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명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는 “시의 귀신[詩魔]을 몰아내는[驅] 글”이라는 뜻의 <구시마문(驅詩魔文)>을 썼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시 귀신이 저지른 5가지 죄를 들어 쫓아내려다 꿈에 나타난 시귀신의 꾸지람을 듣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이규보가 든 시귀신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시 귀신은 순박한 인간을 현혹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천지자연의 도리를 누설하여 사람들을 각박하게 한다. 세상 온갖 것을 남김없이 보는 대로 읊는다. 무기나 높은 지위 없이도 사람을 죽이거나 나랏일에 관여한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혼란케 하거나 병들게 한다.


시 귀신의 죄라고 나열된 것들은 모두 중대해 보인다.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세상을 타락시키는 주범처럼 묘사되고 있으니 시 귀신은 절대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마냥 그렇게만 보아야 할까. 시 귀신의 죄들을 가만히 뒤집어 살펴보면 반어적인 수법으로 글(시)을 예찬하고 있는 이 글의 숨은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순박한 인간 현혹하기? 세상의 적나라한 본질을 아는 ‘불온한’ 사람 만들기다. 세상 온갖 것을 남김없이 보는 대로 읊기? 인간 세사의 지엽과 말단이 아니라 고갱이, 본질, 진실, 핵심 드러내기다. 사람을 병들게 하기? 일상적인 의식의 상투성과 표피성을 깨트리는 정신의 도끼다. 이규보가 종내 시 귀신을 스승으로 삼은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았을까.


3


나는 미스테리와 시마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글쓰기가 천둥 번개 같은 영감과 통찰에 이끌려 마무리되는 예술적 글쓰기의 한 전범을 예시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와 같은 글쓰기는 아마도 일필휘지로 갈기는 붓 끝에서 순식간에 종료될 것이다. 그런 글을 쓰는 이른바 천재적인 작가는 그 과정에서 심미적 쾌감으로 일렁이는 내적 충일감을 만끽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글쓰기는 별로 많지 않으며, 천재 작가는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평범한 일상인인 우리가 글을 이끄는 미스테리한 동기와 글 귀신의 놀라운 요술에 홀려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글을 그렇게 쓰지 않는다. 혹여 미스테리한 동기와 시마의 꾀에 빠져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는 하나하나의 순간들은 지지부진하고, 고통스럽다.


4


나는 세상에 일필휘지의 글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불과 몇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내면서도 골치아파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보고서 한 편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은 사람에게 하얀 한글 화면은 광활한 만주 벌판처럼 다가올 수 있다. 미지의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정성이 가득 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글은 단숨에 써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한 편 글의 첫 문장을 만들어 내기까지 수많은 불면의 밤과 고통의 한낮을 보낸다. 간신히 첫 문장을 써 넣은 뒤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이어붙이면서도 자신의 형편없는 글쓰기 능력을 곱씹으면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래도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문장을 하나하나 써 나간다. 어느덧 시간에 걸쳐 간신히 한 단락 분량의 문장을 썼다. 읽어 보고, 고치고, 다듬는다. 그리고 지워 버린다. 이 가련한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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