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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신경정신의학자이자 비교행동학자인 보리스 시륄니크(Boris Cyrulnik, 1937~현재)가 쓴 책 <관계: 사랑과 애착의 자연사>(아래 ‘<관계>’; 2009, 궁리)를 주문했다. <관계>는 유아기에 부모와 맺은 애착 관계가 인생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득력 있는 필치로 추적한 책이라고 한다.
시륄니크라는 낯선 이름을 만난 것은 최근 읽은 <두려움과 용기의 학습>(2016, 책세상) ‘에필로그’에서였다. 이 책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철학자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José Antonio Marina)가 썼다. 마리나는 ‘일상의 겸손한 영웅주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륄니크가 들려준 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것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과 집시 아이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독일 경찰 예비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 대부분은 명령을 실행했다. 20퍼센트 이하의 군인들만 이 명령을 거부했다. 나머지 80퍼센트의 사람들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심지어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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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자. 힘없는 유대인과 가엾은 집시 아이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그대로 따른 독일 경찰 예비군은 ‘80퍼센트’였다. 나와 너, 곧 평범한 우리 모두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점잖고 가정적이며 성실한 ‘모범 시민’이었다. 나치 전범 추적자이자, ‘용서’와 ‘화해’에 관한 세계적인 명저 <해바라기>의 저자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 1908~2005)이 “죽음의 장부를 담당한 경리”로 묘사했을 정도로 유대인의 치를 떨게 한 아이히만은 놀랍게도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중 일부만이 반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충복이자 아이히만의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는 유대인 절멸 정책인 “최종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입안한 1942년 반제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저승사자’,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별칭으로 불린 하이드리히는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 음악도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늘 음악으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악의 마당’을 벗어나 뒤편으로 들어간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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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는 80퍼센트의 독일 경찰 예비군이나 아이히만처럼 의무에 대한 기계적인 행동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신중하고,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고 한다. 각자에게 ‘책임감’으로 요구되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그런(책임감이 요구되는-필자) 것이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맹목적인 행동주의’는 안 된다!
마리나는 비판적 능력과 휩쓸리지 않는 용기와 시대에 역행해서 나아가는 일의 당위성・필요성 들을 강조했다. 이른바 윤리적 용기, 곧 일상의 겸손한 영웅주의다.
마리나는 개인주의에 몸을 숨기는 것은 잔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신 그는 일상의 겸손한 영웅주의와 용기 있는 사소한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경찰을 부르거나, 지금 일어나는 부당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대의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용기는 정의의 문을 열어준다. 용기는 욕구, 정치적 독재, 타인에 대한 의존성, 타락의 유혹, 두려움의 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 그 자체다. 용기는 비상한 에너지로 지능의 “경이로운 순환”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또 다른 예다. -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2016), <두려움과 용기의 학습>, 247쪽.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절멸 정책인 “최종 해결 방안”을 입안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9D%B8%ED%95%98%EB%A5%B4%ED%8A%B8_%ED%95%98%EC%9D%B4%EB%93%9C%EB%A6%AC%ED%9E%88)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