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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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백두산부대 신병교육대(신교대)에서 정식 입대 훈련을 받았다. 1989년 12월 21일에 입소했다. 훈련병 번호 89번. 강원도 양구군 깊은 산골짜기였다.
신교대의 추위는 고통스러웠다. 체력 훈련으로 포장된, 기합으로 불린 각종 얼차려가 힘들었다. 선착순은 늘 최악의 악몽이었다. 약간의 틈과 기회가 있으면 동료들을 사정없이 옆으로 밀쳐내야 했다. 달리기 실력의 영향은 두 번째였다.
전우(?)를 짓밟아야 내가 산다! 그 비정한 얼차려가 주는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하면 지나칠까. 어느 순간 팔꿈치로 동료를 밀쳐내는 나, 그리고 동기들 모두가 무서웠다.
2
아돌프 아이히만은 ‘성공’을 믿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공이 아이히만에게 ‘좋은 사회’의 기준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에 대한 아이히만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이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중략)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 한나 아렌트(200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198쪽.
아이히만에게 독일은 ‘좋은 사회’였다. 히틀러의 ‘성공’은 곧 그 자신의 성공을 보증할 확실한 증거였다. 그런데 아렌트는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라고 보았다. 양심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양심의 기준은 ‘히틀러’였다.
재판부 앞에 선 아이히만은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외부로부터 온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자신에게는 ‘히틀러’에 포박된 양심뿐이었다는 것. 그것은, 그가 경청할 수도 있었던 외부의 목소리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검찰의 주장, 나아가 상식적인 일반인의 주장과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주장은 명확했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으므로 나는 무죄다.
‘내면적 이주’(inner emigration)라는 말이 있다.(위의 책, 198쪽 참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3제국에서 종종 지위를 가졌던 사람들이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 전쟁이 끝난 뒤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자신들은 (나치) 정권에 대해 항상 ‘내면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말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령 오토 브라트피슈 박사는 소련 볼코비스크와 민스크 등에서 7,4000명 이상을 살해한 제8특수작전특공대의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였다. 그는 독일 법정에서 자신은 항상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반대를 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면의 반대’ 운운하는 내면적 이주자들은 실소를 자아낸다. 냉소적으로 평가하면 그것은 무뎌진 ‘양심’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와 같은 것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런 내면적 이주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썼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 위의 책, 209쪽.
3
아이히만은 ‘히틀러’라는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양심’을 준수했다. 그 점은, 그가 ‘시민’으로서 의무를 준수하고 명령을 지켰으며 법을 따랐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아렌트에 의하면 나치의 유대인 절멸 정책인 ‘최종 해결’은 히틀러 총통의 명령에 이어 공무원들(행정가들)과 변호사들과 법조인들이 기초한 엄청난 양의 법규와 지시에 따라 합법성의 외관을 갖게 되었다. 아이히만은 그 법규와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은 인간 양심의 문제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합법성의 외피를 입고 있으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이 ‘살인’일지라도 따를 수 있는 존재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 나오는 지점이다.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위의 책, 391쪽.
주변 사람 모두가 ‘비양심’적으로 반칙을 일삼는다. 나도 반칙한다. 어느 사이 ‘반칙’이 양심에 부합하는 행위가 된다. ‘살인’이 인간성의 본질에 반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일지라도, 히틀러의 땅에서처럼, 수많은 법규와 지시가 살인을 공공연히 인정한다. 어느덧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위의 책, 226쪽)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어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가며 사는가.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아돌프 히틀러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8F%8C%ED%94%84_%ED%9E%88%ED%8B%80%EB%9F%AC)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