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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껄렁거리는’ 스타일이었다. 재우가 큰 키로 어슬렁거리듯 교실 문을 들어서면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럴 때 나는 재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표정과 눈빛을 차분하게 하려고 했다. 경계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 안면 근육을 미묘하게 조절했다. 나는 가슴에 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조용히 가라앉히며 손을 펴 자리를 가리켰다. 재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리에 가 앉았다.
‘진격’하는 중학생 아이들이 있다. 교사들은 그들과 교실에서 ‘전투’를 치른다. 좋다. 교육자로서 도발하는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그 교육적 열정을 믿는다. 다만 기억하라. 지옥의 문으로 가는 길은 언제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영국 속담이다.
‘교실 대전’을 벌이는 아이와 교사는 검투사가 된다. 교실은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다. 아이에게는 응원군이 있다. 반 전체 아이들이다. 교사 검투사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거나 아무도 없다. 교사는 교실 대전에서 예외 없이 패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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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 423만 명을 대상으로 한 ‘2016년 학교폭력 1차 실태조사’ 결과 전체 피해 학생 중 68퍼센트가 초등학생이었다고 한다. 초등 4학년의 피해 응답률이 3.9퍼센트로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5학년(1.6퍼센트)이나 6학년(0.9퍼센트)보다 높았다고 한다.
초등 4학년이면 11살이다. 일반적인 ‘사춘기 연령’에 비추어 볼 때 아직 어린 나이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폭력 집단’이 된 것인가. 그들이 살아가는 교실이 ‘폭력 진지’처럼 돼 버린 이유가 있을까.
지속적인 학교폭력 교육 덕분에 미묘하고 다양한 폭력 유형을 인지하는 아이들의 능력이나 감각이 늘어나서 그랬을지 모른다. 크고 작은 폭력을 민감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면서 인권 감수성이나 경각심이 높아져서일 수 있다. 상당히 타당한 분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적으로’ 성공했는가.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 것 같다.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가 ‘학교폭력 매뉴얼’이 과도하게 통제하는 공간이 돼버렸다고 평가하고 싶다. 도덕적・윤리적인 차원에서 각자의 양심과 정의에 비추어 마땅히 행해지거나 금지되어야 할 행동들이 ‘상・벌점 체크리스트’의 검사 항목으로 전락해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 결과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한 아이가 선생님에게 ‘지나치게’ 활발하게 인사를 하면서 상점을 요구한다. 무심결에 욕을 하는 친구가 보이자 선생님에게 쪼르르 달려와 ‘내부 고발’을 한다. 한낱 ‘고자질’에 불과할 수 있는 행동을 하면서 아이는 정의의 사도가 된 양 으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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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학교는 너무 많은 규칙과 징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어떤 관용도 없는 규칙은 특히 해로우며, 이런 규칙을 사용함으로써 교육자들을 어리석게 만들고 있다. 친구에게 뽀뽀한 유치원생에게 벌을 주며, 자신의 칼이 아니라 엄마의 부엌칼을 실수로 가져온 4학년 소녀에게 정학 처분을 내린 것은 정의를 한갓 웃음거리로 만드는 어리석은 대처라고 할 수 있다. 교사와 부모들은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나 말에 대해 무관용의 태도(zero tolerance attitude)를 취하는 것을 권장해야 하지만, 규정된 징벌에 의해 뒷받침되는 무관용의 규칙(zero tolerance rule)은 지양해야 한다. (중략) 위반에 대한 규칙을 규정하는 징벌은 있을 필요가 없다. 정말, 교사와 학생이 돌봄과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면 구두를 통한 암시가 효과적이다. 존중과 배려로 타인을 다룸으로써 학습을 위해 요구되는 안정적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모든 위반사항에 대해 철저하게 징벌하는 것은 아마 역효과가 날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을 화나게 할 수 있는 징벌을 받거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결말-죗값을 치른 것-을 낳게 할 수 있다. - 넬 나딩스(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293~294쪽.
넬 나딩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연스러운 돌봄(natural caring)’과 ‘윤리적 돌봄(ethical caring)’을 바탕으로 배려와 신뢰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연스러운 돌봄은 규칙이 아니라 성향에 의해 유지되고, 서로를 만나 대하는 데 있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정중한 방식이다. 윤리적 돌봄은 배려를 받고 돌보면서 형성된 돌봄의 전체 행동 범위들을 신뢰하는 방식이다.
나딩스 교수는 학교와 교사가 책무성, 규칙, 평가, 징벌에 의존하는 방식의 문제를 강력하게 지적했다. 이와 같은 방식이 비난을 피하려 하고 권위 있는 사람들의 간섭을 줄이려고 자기 방어적 행동을 조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책무 대신 책임을 강조했다. 책임을 강조하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책임을 지게 되고, 자신의 동료에게 조심스럽게 응답하도록 자신을 격려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책무성(accountability)은 자기 방어적 기제를 발동시킨다. 이와 달리 이보다 아름다운 개념인 책임감(responsibility)은 타인의 존재와 요구를 깨닫고 존중할 것을 강조한다. 마르틴 부버(1878~1965, 종교철학자-필자 주)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encounter)이다. 우리에게 할당되고 위임된 삶의 영역에 대한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 적절한 반응으로서 중요할 수 있는 행위의 관계를 획득하기 위해”라고 썼다. 시선의 마주침, 미소, 손가락을 들어 경고하는 것, 부드러운 암시, 실망스럽게 눈을 찌푸리는 것 등 이런 행동들은 학생을 독특하고 특별한 인간 존재로 인식하는 총체적 반응이다. 이렇게 정립된 관계는 끊임없는 사회적 상호작용은 물론이고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한 단계를 상정한다. - 위의 책, 295~296쪽.
나딩스 교수가 강조하는 또 다른 돌봄 전략은 대화다. 그에 따르면 대화는 말하는 것, 듣는 것, 개방성의 특징을 갖는다. 프레이리 식으로 끝이 열려 있다. 돌봄 윤리에 호응하는 대화는 학생들의 주의산만에 적절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대화 제재보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더 중요하다. 나딩스는 대화가 지적으로 자극을 주고 대화 상대와의 관계를 고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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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존재다. 교사는 모든 아이가 괜찮은 인격과 품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와 근거를 끊임없이 찾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 들어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못하고 나쁜 짓을 해도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는, 그런 무조건적이고 제한 없는 사랑을 베푸는 교사가 되고 싶다.
아이들은 무조건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거의 끝까지 아이들은 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선생은 그래도 그의 말을 듣고 함께해야 한다. 기껏 한두 달 공부 좀 해보려고 하다 실망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학생들이 많으므로 선생도 아이가 몇 달, 심하게는 일 년 내내 끝까지 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더라도 그를 믿고 기다려야 한다. 선생이란 1학년 때 뿌린 씨는 2학년 때 혹은 3학년 때, 사실은 학교 졸업하고 나서, 중년이 되어서야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꽃 필 것을 믿어야 한다. - 이관희(2015), <선생으로 사는 길>, 삼인, 303쪽.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오스트리아 유대계 출신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다. 영문판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Martin_Buber)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