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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22. 2016

‘교과 민주주의’에 대한 짧은 에세이

1    


마이스터 고등학교 정책은 이명박 정부 시절 도입되었다. 이주호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중점적으로 추진한 정책 중 하나였다. 학교별로 연간 2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개방형 교장 공모제를 통해 기업 경영인 같은 외부 인사가 학교장에 취임했다. 대대적인 ‘기업형 학교 혁신’ 작업이 진행되었다. 제법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호응했다.    


마이스터고 정책 도입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나는 도입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과도한 학벌주의와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고졸 ‘마이스터’가 일정한 사회적 ‘지위’나 ‘위상’을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학력 간 급여 차이가 온존해 있는 현실이 그 가장 큰 이유였다.    


“기술이나 배워라.” ‘기술(자)’에 대한 우리 사회 일각의 인식을 말해주는 말이다. “마음에 차지 않는 선택, 또는 최소한 허용되어야 할 선택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이나’붙임으로써 기술에 대한 비하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마이스터고가 그랬다. ‘기술’을 배우는 마이스터고 학생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걱정되었다. 마이스터고가, 사회 진출을 위한 최소한의 보증 수단(?)인 대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합법적 기제가 될 것 같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는 학생들을 배출하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공인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2    


마이스터고를 둘러싼 논란의 이면에는 직업 교육 문제, 교육에서의 평등 문제 들과 관련되는 뜨거운 논쟁거리가 깔려 있다. 듀이는 직업교육이 반복적인 일을 위한 준비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예측된 운명’과 학교의 ‘걸러내는’ 기능을 반대하였다.[넬 나딩스(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259쪽 참조] 듀이의 주장을 따라 ‘마이스터고’를 ‘기술자’로서의 ‘예측된 운명’의 표지이자 이들 ‘기술자’들을 ‘일반인’에게서 ‘걸러내는’ 도구로 간주하면 지나칠까.     


학교는 걸러내는 과정에 협력하지 않으면서 그 일을 달성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사회적 압력을 학생들이 숙지하는 데 있어 적극적이어야 한다. 학생들은 어찌할 수 없이 스스로 많은 사람들이 내켜 하지 않는 일자리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민주적 희망은 첫째, 사회는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데 적절한 임금(그래서 일이 아니라 급료에서 어느 정도의 존엄성을 갖는다)을 받아들여야 하고, 둘째 자기의 직업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의 다른 큰 영역들 중 하나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넬 나딩스, 위의 책, 259쪽)    


3    


이른바 ‘실업계고(특성화고)’와 ‘인문계고’의 평판과 관련한 차별적인 시선은 ‘직업’, ‘기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선입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에게는 실용적 기술이나 직업을 천시하는 풍토가 있다. 과거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지식 엘리트들이나 관료들이 유교와 유학 중심의 ‘인문학적’ 수양을 주요 목표로 삼았던 역사와 크게 관련될 것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기술교육이나 직업교육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업계고는 고교 서열화 체제의 최하층에 위치한다.(아래 표 참조) ‘특성화’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된, 전통적인 의미의 기술・직업교육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이에 따라 형성된 학생 수준의 전반적인 ‘하향화’ 때문이다.                         

1군: ▲ 자사고(민족사관고, 상산고 등) ▲ 과학고/영재고 ▲ 수도원 최상위권 외고(대원 등)
2군: ▲ 수도권 외고 및 하나고 ▲ 수도권 지역 비평준화 자율고(동산고 등)
3군: ▲ 비수도권 지역 비평준화 지역 자율고 및 명문고 ▲ 평준화 자율고(한가람고 등) ▲ 일반계고 중 입시실적 좋은 일부 고교 ▲ 지방 외고
4군: ▲ 일반계고 ▲ 일부 특화된 특성화고
5군: ▲ 특성화고 ▲ 일부 일반계고(평준화 지역에서 일반계와 특성화고에 떨어진 학생들이 많이 모이거나 비평준화 신설 학교임) - 서용선 외(2013), <교육개혁 미래를 말하다>, 살림터, 162쪽.

    

그러나 기술과 직업이 열등하거나, 기술・직업교육이 타 교과 학문 분야보다 수준이 낮다고 볼 근거는 없다. 우리는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과목들 간의 ‘평등성’을 반복해서 강조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어떤 과목도 다른 것보다 내재적으로 더 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수학이 국어보다 더 지적이라거나 체육이 사회에 덜 지적이라는 식의 생각은 하기 힘들다. 대수학이 요리나 오토바이 수리보다 본질적으로 더 지적인 것은 아니라는 넬 나딩스의 말은 합리적이다.   

  

나딩스 유의 논변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이스터고나 상고를 포함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지적’이지 않다고 보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그런데 ‘인문계’와 ‘실업계’를 구별하고 이들을 차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강고하다.    


일반적으로 ‘지식’, ‘지성’, ‘지적’과 같은 말을 협소하게 쓰거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말들은 이른바 추상적 학문을 다루는 ‘지식인’이나 의식과 관념을 궁구하는 ‘지성인’의 전유물로 쓰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지적’ 자전거 수리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령 ‘인문학’과 같은 분야를 가리킬 때 쓰여야 한다거나, 거꾸로 실용적 기술이나 직업 분야를 가리킬 때 쓰여서는 안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편견에 불과하다. J. W. 가드너(Gardner)가 <Excellence(수월성)>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활동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인간 활동의 수월성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활동이 지고하더라도 조잡성을 조롱해야 한다. 탁월한 배관공은 무능한 철학자보다 무한대로 더 가치가 있다. 배관 일이 보잘것없는 일이라서 그 일의 수월성을 조롱하고, 철학이 지고한 활동이라고 하여 그것의 조잡함을 용인하는 사회라면 훌륭한 배관공이란 존재하지 않고 훌륭한 철학자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배관의 파이프도 철학의 이론도 사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 넬 나딩스, 위의 책, 111쪽에서 재인용함.    


4    


모든 학문・교과 분야는 나름의 특장점이 있다. 거꾸로 그들은 다른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조야함 역시 갖고 있다. “배관 일이 보잘것없는 일이라서 그 일의 수월성을 조롱하고, 철학이 지고한 활동이라고 하여 그것의 조잡함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범박하게 ‘교과 민주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을 고려하고자 할 때 취해야 하는 기본 태도가 아닐까.    


어떤 실용적 활동도, 또는 현장 실습(hands-on work)을 포함한 직업에 대한 어떤 준비도 단순히 육체노동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은 지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으며, 작업장의 토론은 특정의 “행위(doings)”를 넘어 시민의식과 상호 존중, 개인적 생활을 만족시키는 전망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로즈(Mike Rose, 1995; 2005)는 자신의 논의를 민주주의의 의미, 그리고 성장하고 진화하는 민주주의에서 존중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과 연계시킨다. 이러한 민주주의-우리는 이것을 ‘휘트먼풍’이라고 부른다-에서 정직한 노동자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이러한 존중을 받기 위해 대학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 넬 나딩스(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112쪽.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존 듀이(1859~1952)다.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B%93%80%EC%9D%B4)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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