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민주주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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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2015, 문학동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문 부장판사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이념인 민주주의와, 근본적인 사회 계약으로서의 헌법 질서의 근간이 ‘개인’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주의’라는 말을,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25쪽)에 빗댔다. 조금 과장되었긴 하지만 강력한 현실적 의미를 갖고 있는 표현이다. ‘개인’과 ‘개인주의’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개인’에 관한 문 부장판사의 시각은 매우 낯설다.
‘개인’과 ‘개인주의’를 떠올리며 내 식으로 다시 물어 본다. 개인주의자는 민주주의에 약일까 독일까.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이 갖는 일반적인 어감이나 그것이 쓰이는 맥락을 떠올리면 ‘독’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개인주의자는 공공의 요구나 이익보다 자신의 욕망이나 이익에 충실하다.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대립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또 이기주의의 다른 이름처럼 쓰인다.
그러나 문 부장판사가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규정한,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 전혀 다른 개인주의는 ‘합리성’과 ‘사회성’을 전제로 한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자.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 문유석, 위의 책,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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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個人(개인)’의 ‘個’는 ‘사람’을 뜻하는 ‘亻’과 ‘굳다, 단단하다’를 가리키는 ‘固’로 이루어져 있다. 한 사람의 독립성이 이미 굳어진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개인’의 영어 단어 ‘individual’은 라틴어 ‘individualis’에서 나왔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individuum’에 뿌리를 대고 있는데, ‘in+dividuus(divisible), divido(divide)’의 합성어라고 한다.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 홀로 서 있는 존재의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서양에서 쓰이는 ‘개인’ 모두에 독립성이 들어 있다.
역사적으로 개인주의는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나타난 자유주의 담론의 계보 안에 위치한다.[아래 자유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개인’, ‘인간 본성’ 등에 관한 내용은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 계보와 그 너머: 세계화・시민성・민주주의>, 학이시습, 119~129쪽 참조.] 마크 올슨 등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사회적 집합성에 대해 개인이 도덕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인간 본성 개념을 포용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을,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구성한 ‘자기 창조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개인’은 특별한 단서 조항 없이 선험적으로 ‘전제’되는 존재다. 그들은 사회 이전에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근저의 형이상학적 가정 위”[마크 올슨 외(2015:169쪽) 참조]에 자리잡는다.
자유주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개인은 매우 강한 독립성을 갖는다.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채 “형이상학적 가정”이라는 추상적인 토대 위에 개인이 자리잡는다. 그런데 이는 식의 발상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과 맞지 않아 보인다. 개인이 이토록 강조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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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반대편에 ‘사회’나 ‘공동체’가 있다. 존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 동서문화사)에서 펼친 논변에 따르면 도당(徒黨) ‘사회’나 파벌(派閥)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진정한 사회나 공동체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전달되어 공유되는 많은 관심이 존재하고, 다른 공동양식(사회, 공동체-필자 주)과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접촉점이 존재하”[존 듀이(), 위의 책, 97쪽]지 않기 때문이다.
도당이나 파벌들에게는 공통된 관심이 많지 않다. 그들의 거의 유일한 관심은 훔친 물건의 배분이나 무리를 지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적 이익이다. 그들 사이에는 자유로운 왕래가 없다. 무언가를 서로 주고받는 기회를 갖지 못하므로 공유하는 가치가 거의 없다.
도당이나 파벌의 고립이나 배타성은 그 반사회적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스스로 고립되어, 다른 집단과 충분히 상호작용할 수 없게 하는 ‘독자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면 어디에서나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의 주요목적은 보다 넓은 여러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개혁하고 진보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것을 지키는 데 있다. 서로 고립된 국가, 보다 큰 사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사사로운 내부 문제에만 집중하는 가정, 가정이나 지역사회의 관심에서 떠난 학교, 부자와 빈자, 교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별에서 앞서 말한 특징이 나타난다. -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동서문화사, 99~100쪽.
오늘날 ‘학교 공동체’ 담론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명제로 받아들여진다. 그런가. 듀이는 가령 “지역사회의 관심에서 떠난 학교”가 도당이나 파벌이 갖는 고립이나 배타성을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학교가 ‘공동체’를 지향할 때 “생활의 경직이자 형식적 제도화를 조장하고, 집단 내부의 정적이고 이기적인 이상을 일으”[존 듀이(, 위의 책, 100쪽)키는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지 숙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할 때, ‘공동체’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넬 나딩스는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공통 교육(common education)과 강한 일체감, 공동체 의식이 파시즘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교육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에릭 도널드 허시 2세(Eric Donald Hirsch, Jr.)는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지오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를 콜럼비아 교육대학에서 출발한 진보적 교육 이념의 숭배자로 묘사했다. 그런데 젠틸레는 이탈리아 전체주의 독재자 무솔리니 치하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일했다. 젠틸레는 일반적으로 ‘파시즘 철학자’로 불리는 학자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으며, 열정적으로 공동체 정신과 그 정신의 일체성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여하간 공동체의 이상이 이미 저 위에 있다고-신에 의해서든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든 특정한 지식 체계에 의해서든 구성되어 있다고-가정한다면, 교사의 과업은 거의 무수한 전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 공동체(democratic community)라는 것이 끊임없이 구성하는 작업이라고 말한 듀이의 생각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교사의 과제는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어내며 확장하고, 반성과 숙고를 격려하는 일일 것이다.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공통의 지식 체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 위해 의사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 넬 나딩스(2016),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 살림터, 103~104쪽.
듀이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강조했다. 민주주의적인 교육을 통한 개인의 변화를 믿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공동 생활의 한 양식, 연대적인 공동 경험의 한 양식”[존 듀이(, 위의 책, 101쪽)으로 정의했다.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관심을 공유하면, 그들 각자는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목표나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숙고해야 하게 된다고 이해했다.
듀이에 따르면 하나의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되어 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활동의 완전한 인식을 방해하는 계급적・민족적 장벽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지점이 많아지고 더 다양해진다는 것은 개인이 반응해야 할 자극이 더 다채로워짐을 의미하며, 그 결과 개인의 행동 변화가 조장된다고 보았다.
듀이의 논지에 따르면 개인의 능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상호작용에서 극대화한다. 상호간 관심을 차단하고 접촉을 막는 배타적인 집단에서는 그러한 능력이 억눌린다. 공동 생활의 한 양식이자 연대적인 공동 경험의 양식인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존 듀이의 교육론이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선작용을 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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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교육의 본질적인 차원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범박하게 정리해 보자. 개인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의 일부에 종속되어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물론 고립된 개인이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는 언제든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각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 간 관계와 상호작용이 충분하지 않은 공동체는 개인들을 억압한다. 특유의 능력을 기르거나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공동 생활과 공동 경험의 양식인 민주주의 공동체를 지향할 때 개인이 능력이 극대화한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에릭 도널드 허시 2세다. 한국어 <위키 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A6%AD_%EB%8F%84%EB%84%90%EB%93%9C_%ED%97%88%EC%8B%9C_2%EC%84%B8)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