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들은 왜 오이 조각을 내던졌을까
프란스 드 발(2014)의《착한 인류: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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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돌이’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우리 집에 함께 산 개 이름이다. 깐돌이는 우리 집 식구들과 각별하게 지냈다. 개를 유별스럽게 좋아한 아버지와 나와 특히 그랬다.
깐돌이는 아버지가 새벽일을 하러 지게를 지고 고샅을 나가면 그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낮에 논밭에서 일을 할 때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깐돌이와 등굣길을 함께했다. 깐돌이는 나와 동생이 책가방을 매고 동네 어귀를 빠져 나와 산귀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졸랑졸랑 뒤를 따라왔다.
우리가 다닌 등굣길은 징검다리가 놓인 넓은 시내를 건너고 제법 높은 재를 타고 넘어 가는 한 마장 넘는 길이의 길이었다. 우리는 걱정스러워하며 깐돌이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을 홰홰 내저었다. 깐돌이는 그때서야 발길을 돌렸는데, 뒤돌아 가면서도 아쉬운 듯 몇 번이나 우리를 돌아보곤 했다.
깐돌이는 종종 학교까지 따라왔다. 깐돌이는 우리 뒤에 바투 붙지 않고 저 멀리서 우리 눈치를 보듯 걸음을 옮겼다. 마치 우리가 손짓을 해 자기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치며 한사코 뒤따르는 깐돌이에게서 애틋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학교에 온 깐돌이는 교실로 이어지는 계단참 입구나 교무실 쪽 정문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있거나 넓은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어느 때가 되면 아침에 집에서 학교까지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갔다.(몇 번은 우리가 학교 수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의 풍경이 흐릿해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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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이성적인 도덕률에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이 우리가 쉽게 가 닿지 못하는 “저 위”(합리적인 이성의 세계나 신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본성상 언제든 악행과 악덕에 물들 수 있으므로 엄격한 도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사람은 착하지 않다. 미국 생물학자 마이클 기셀린의 “‘이타주의자’를 할퀴어 ‘위선자’의 피가 흐르는 것을 보라.”라는 말은 이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종교주의자는 극단적인 무신론자 과학자와 상통한다. 이들 사이에는 인간이 자신의 선한 본성을 지키기 위해 의지하는 수단의 차이밖에 없다. 전자는 신에 의지하고 후자는 과학에 기댄다. 나는 그들에게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스피노자의 제자인 우리는, 인간과 동물 안에 드러나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 영혼의 아름다운 질서와 법칙성 속에서 신을 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신의 존재라는 믿음이 논란이 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중략) 나는 그런 과제와 결코 씨름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겐 그런 믿음이 인생에서 어떠한 초월적 전망도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종교보다-글쓴이) 더 숭고한 수단을 누가 과연 인류에게 성공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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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인간 예외주의”를 신봉한다. 인간 예외주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유일무이한 특징, 자질, 능력을 강조한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반성 과정을 거쳐 차근차근 도덕성을 발전시”(35쪽)킨다. 도덕 원칙이 먼저 생기고 그 원칙이 인간 행위에 적용된다.
그런데 인간 예외주의의 한 기원을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발흥한 것으로 보는 글쓴이의 흥미로운 견해를 보자.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외적인 인간의 기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들의 조상인 사막 유목인들의 환경 속에는 영장류가 없었다. 그들은 영양, 뱀, 낙타, 염소 등만 보았다. 1835년 인간을 닮은 유인원이 최초로 런던 동물원에 공개되자 빅토리아 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통스럽고 언짢을 정도로 인간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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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에 따르면 인간 예외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을, 칸트처럼 밤하늘의 별에서 찾지 않고 우리 인간 존재 자체의 본성에서 찾을 수 없을까. 우리 본성 속에 영장류 동물 특유의 공정성과 정의로움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때 “위에서 주어진 어떤 원칙과 일치하는지 매번 심사해야 한다면 우리의 인식 능력에 너무도 큰 부담이 가해”(35쪽)지지 않을까.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착한 인류》에서 이런 의문들을 다루면서 인간 예외주의자들과 달리 도덕이 아래에서 위로 왔음을 차근차근 논증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신이 준 계시나 계명, 이성의 치밀한 논리 작용에 따라 만들어진 도덕률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라는 배경에서 강력한 압력을 받은 결과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공정성에 대한 감정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어떤 과제를 수행한 원숭이 주인공에게 오이 조각을 준 뒤 같은 과제를 수행한 다른 원숭이에게는 포도를 주었다. 원숭이 주인공은 동료와 자신이 똑같이 오이 조각을 받을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다른 원숭이가 포도를 받는 것을 보고 자기 손에 든 오이를 내던졌다! 개는 보상 없이도 어떤 장난을 반복적으로 칠 수 있지만 다른 개가 같은 장난에 대해 소시지 조각을 얻는 것을 보면 더 장난치기를 거부한다.
이 책에는 이런 사례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리고 도덕성과 진화의 관계에 관한 최신 생물학, 심리학 연구 결과와 이론, 종교와 과학 사이의 논쟁의 역사 속에 숨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책 전편에 걸쳐 등장하면서 보통 사람의 편견과 상식을 깨뜨린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글쓴이가 힘주어 강조하려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무리 동물이며, 그로 인해 사회적 연대에 가치를 둔다. 이런 배경이 없다면 종교가 아무리 지치도록 미덕과 악덕을 설교해도 우리는 전혀 그 핵심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런 것들을 받아들인다. 진화하면서 관계의 가치, 협력의 이점, 신뢰와 정직의 필요성 등을 본성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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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은 동물 진화의 역사와 함께한다. 인간의 이타적인 충동과 공감 능력은 영장류의 오랜 진화 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물은 사람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다. 글쓴이는 생물학적으로 가까운 친척 사이인 두 종이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하게 행동한다면 ‘절약의 법칙(law of parsimony)’에 따라 그 행동의 정신적인 과정도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글쓴이가 책의 어느 대목에서인가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반려 동물을 한 번 키워 보라고 조언한 대목을 인상적으로 보았다. 글머리에 들려 준 깐돌이가 퍼뜩 떠오른 것이 이 대목에서였다. 열두어 살 무렵의 나는 깐돌이와 함께 지내면서 변치 않는 우정이나 신뢰의 감정에 뿌듯해하곤 했다. 나는 글쓴이가 인간 예외주의자들에게 건넨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