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히스토리’는 긴 역사의 흐름을 따라 큰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과학적인 답변을 내놓는 역사 서술의 한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다. 빅 히스토리는 ‘거대사’를 다룬다. 우주의 역사, 지구의 탄생과 성장, 인류 문명의 전개 같은 큰(big) 주제들에 관심을 갖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떠올리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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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히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이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지금 바로 눈 앞에 놓인 빵 한 조각과 내일 아침에 있을 회의를 걱정하며 사는 우리에게 장대한 시선을 갖게 한다. 빅 히스토리의 저자가 웅대하게 펼쳐 보이는 대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찰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세가 마치 조그만 개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는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와 가치관을 돌아본다.
빅 히스토리는 장구한 역사의 크고 작은 모퉁이와 굴곡을 거대한 흐름의 경향도에 나타나는 하나의 변수처럼 취급한다. 그것은 저자가 선택한 서술의 입각점에 따라 주요 변수, 종속 변수, 또는 무의미한 변수의 자리에 위치한다. 당연히 누군가는, 다른 시선과 관점에 따르면 그 중요도와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모퉁이와 굴곡들이 부당하게 왜곡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것이 빅 히스토리가 갖는 중대한 한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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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5, 김영사) 역시 빅 히스토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600쪽에 가까운 대작의 주축은 인간 종, 사피엔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다. 저자는 사피엔스의 역사를 세 개의 혁명(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기준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그 사이에 사피엔스가 꿈꾼 전 지구적 비전의 역사를 화폐, 제국, 종교의 차원에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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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가 몇몇 혁명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인류 문명이 현재 상태 그대로 진행된다면 인간 종의 미래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두 갈래 길에서 디스토피아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역시 오래 전부터 들어 온 바다. 저자가 책에서 취한 시선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개미 한 마리 같은 내 신세” 따위의 겸허한 성찰을 경험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무엇보다 저자가 제국의 역사와 의미를 서술하기 위해 취한 관점이 불편했다. 무슨 관점을 취하든 저자의 자유 아닌가. 그런데 다음과 같은 서술은 자신이 취하는 역사 서술의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부풀리거나 왜곡하는 것에 가깝다.
“모든 제국을 검게 지워버리고 제국의 유산을 모두 거부한다는 것은 인류문화의 대부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국의 엘리트들은 정복에 따른 이익을 군대와 성채에만 쓰지 않았다. 철학, 예술, 사법제도, 자선에도 썼다. 아직 남아 있는 인류의 문화적 성취 중 상당한 몫은 제국이 피정복민을 착취한 덕분에 생겨날 수 있었다.”
나는 저자에게 자신이 말하는 ‘인류문화’에 멕시코 만에서 발흥하여 번성한 아즈텍 문명이나 안데스 산지의 비밀스러운 잉카 문명이 포함되는지 묻고 싶다. 이들은 유럽의 냉혈한 제국주의자들이 멸망시킨 문명의 대변자들이다. 그들의 문화적 유산이 제대로 남겨지지 않은 것은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자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이루어진 대영제국의 제국주의 덕분에 인도 등 제3세계 국가들이 민주주의, 인권 등의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식의 입장을 보인다. 신박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150쇄(이렇게 두꺼운 책이 150쇄까지 찍혀 팔렸다는 게 놀랍다.)까지 찍힌 이 책의 해당 대목들을 읽으며 불편한 감정을 느낀 독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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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피엔스》 같은 빅 히스토리류 저작의 매력을 다른 데서 찾는다. 제법 비싼 이 책을 수년간 주저하다가 구해 읽은 이유이기도 한데, 학제적 연구 분야들의 최신 성과나 역사의 비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 표면에 착륙하기 앞서 미국 서부 사막에서 달 탐사 훈련을 받다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만나 나눈 이야기가 가장 놀랍고, 즐거웠다.
그런 몇 가지 놀라움과 즐거움을 제외하고, 《사피엔스》에서 어떤 깊은 통찰이 주는 감동이나 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놀랍도록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아쉬움이 크게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