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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pr 20. 2020

나는 누구에게 투표했는가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 자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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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났다. 총성 대신 말로 치른 ‘전쟁’의 마지막을 누군가는 잔치로, 누군가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악몽으로 휘갑했을 것이다.


전쟁의 끝이 참전자들을 승자와 패자만으로 나누지는 않았으리라. 어떤 사람은 자신이 누리는 승리의 기쁨이 최후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으면서, 선거 과정에서 체감한 정치적 감수성을 장차의 올바른 정치 활동을 위한 디딤돌로 간직할 줄 아는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선거 패배의 아픔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면서 앞으로 영영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정치적 어둑시니도 있을 것이다.


2

투표소 안내 표지

총선 당일 저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가 내게 누구를 찍었느냐고 물었다. 평소 무심히 질문 하나를 던지고는 또 다른 질문거리를 속사포 쏟아내듯 하는 녀석인지라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아들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빠의 정치적인 사생활 정보라 알려 줄 수 없어.” 내가 옹졸한 대답을 내놓으며 답변하기를 거절하자 “절대 비밀 유지할 테니 알려 주시라.”라며 아들이 채근했다. 나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지역구 후보와 비례정당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이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물었다. “아빠가 지지한 ○○○ 후보와 △△△ 정당이 잘 할 것 같아요?” 그들이 잘 할 것 같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투표 용지에 기표 도장을 꾹 눌러 찍은 게 아니었겠나. 기분이 이상했다. 아들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그런 확신이 별로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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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왜 찍었을까. 과열된 지역주의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구도로 말미암아 묻지마 식 투표 행태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지향점이나 의식을 가진 후보자에게 표를 준다. 그들이 나를 대신해 정치적인 실천 행위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대신한다”는 것은 그들이 나의 정치적 목표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전제를 보증해 주는 근거를 얼마나 가지고 투표장에 가는 걸까. 내가 ○○○ 후보와 △△△당을 찍은 것은 이른바 ‘차선 투표 전략’(최선의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차악 투표 전략’이었다고 말해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다.)에 따른 결과였다. 그들이 나의 정치적 목표나 이해관계를 진정으로 대신해 줄 만한 확실한 근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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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지지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한두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특정 후보나 정당이 나와 같은 정치 지향점이나 의식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 자신을 대신해 정치적 목표나 이해관계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리라 기대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 차원의 이야기다.


말 바꾸기나 공약 파기가 현실 정치인의 제일 덕목(?)처럼 통용된다. 정당 정책은 정치 지형이나 사회적 환경의 변화 여하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그들은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정치적인 로드맵을 수시로 변경하고 포기하거나, 뻔뻔스럽게도 우리가 애초 기대한 것과 정반대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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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지지 의사를 결정하는 데 좀 더 본질적인 차원을 고민하는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한 시사점을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정치 이론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한 명제에서 찾는다.(버크는 ‘보수주의의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썼다.)


버크는 선출되는 의원은 ‘대리인’이 아니라 ‘대표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인들은 의원의 성실성을 판단할 수 있고, 의원들 역시 선거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원들이 자기를 대표로 뽑는 선거인들의 지령이나 사전 지시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애써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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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정부를 이끄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를 구성하는 지방의원들을 뽑는 선거에서 나의 이해관계를 더 성실하게 실현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를 뽑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버크의 명제에 따르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 의원은 ‘나’를 단순히 대리하는 사람으로서보다는 ‘우리’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이해된다. 나는 국가나 사회, 곧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노력하는 국회의원을 고르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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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회 의원이든 국회의원이든 그들은 원칙적으로 각자의 정치적 야욕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지방, 또는 국가) 전체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러나 실제 정치 현실은 의원들의 사리사욕이나 파당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여 시궁창처럼 굴러가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제도 정치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가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선거를 포함한 일체의 제도 정치적 행위는 보수주의의 속성을 띨 수밖에 없으며, 일정 부분 양심과 정의 같은 보수주의적인 가치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나는 과연 얼마나 인지하고 있었을까. 공동체의 ‘대표자’보다 ‘대리인’을 선발하는 정치 선거 문화가 온존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정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한 짤막한 자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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