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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May 12. 2020

‘내가 대체 뭐라고?’

얀테의 법칙과 방어적 비관주의에 대하여

1


최근 읽은 《절제의 기술》(스벤 브링크만, 다산초당, 2020)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계관의 원천에 관한 이야기였다.


2


브링크만에 따르면 트럼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자기계발 분야의 복음서 같은 책이 된 《긍정적 사고의 힘》의 저자 노먼 빈센트 필이라고 한다. 필은 트럼프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다닌 마블합동교회의 목사였으며, 트럼프의 첫 번째 결혼식 주례를 섰다. 이후에도 트럼프는 필에 대해 “그는 아주 위대한 사람”, “그의 말은 온종일이라도 들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트럼프가 필을 숭앙하고, 긍정주의의 화신처럼 살아가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결합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온갖 허풍과 확고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트럼프는 긍정적 사고의 화신이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도 절대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돈, 더 많은 관심을 차지하려 한다. 그의 온몸은 결코 완전히 채울 수 없는 듯 보이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긍정적 사고는, 물론 사회적으로는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 그는 자신에게 맞서는 이를 조직적으로 비하하고 모욕한다. (위의 책, 50~51쪽)


3


브링크만은 트럼프와 필의 일화를 ‘방어적 비관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례처럼 제시한다. 나는 방어적 비관주의를, 필이나 트럼프를 위시한 과잉 긍정론자들의 공격적 낙관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례처럼 이해한다.


방어적 비관주의는 한 마디로 고난과 실망스러운 결과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태도와 관련된다. 브링크만은 이와 같은 태도가 대체로 우리의 불안을 줄여준다고 주장한다.


4


세계적인 ‘행복 국가’ 덴마크에는 ‘얀테의 법칙’이 널리 통용된다고 한다. 얀테의 법칙은 ‘내가 대체 뭐라고?’라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는데,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자만하지 말아야 하며, 성공에만 목메는 일은 다소 천박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가리킨다. 그것은 삶에 대한 낮은 기댓값을 바탕으로 하며, 실망과 실패를 미리 예상(?)하고 견디는 심리적 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실패와 고난과 좌절이 언제든지 자신의 삶 속으로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덴마크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행복 국가를 일궈 가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브링크만의 언급대로, 높은 수준의 평등과 복지 시스템, 타인에 대한 신뢰 문화가 행복국가 덴마크의 기본을 만들었겠지만,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가 주관적 행복감에 미치는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5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수나 실패에 대해 극도의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갖는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 국면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여전히 미흡한 사회적 안전망 아래서는 실수나 실패가 순식간에 우리 자신의 삶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현실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를 향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나, 특수고용노동자나 예술인에게도 고용보험 적용을 추진하겠다는 정부(고용노동부)의 정책적 시도들이 하루빨리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시스템이 전부가 아니지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질 때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칸트의 말은 여전히 새겨들을 만하다.


6


사람은 실패하고 실수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하는 사람이 패배자나 무능력자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든지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다.


거꾸로 자신의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닐까. 그들이 가는 길은 유아독존이나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독재자, 전제주, 못 말리는 꼰대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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