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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26. 2020

이야기는 힘이 세다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2020),《이야기하는 법》,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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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을 쓰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학교 안팎에서 학교 민주주의를 해치는 정책, 제도, 문화, 습속을 어떻게 더 명료하게 분석해 독자들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내 손끝을 타고 나오는 문장들이 사회학적 연구 논문에서나 볼 법한 무미건조한 색조를 띠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방법이 삼단논법 같은 논리 정연한 추리나 정밀한 논증 뿐이라는 식의 맹목적인 관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추리나 논증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그저 내 어설픈 생각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데 골몰했지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책을 내고 두어 달이 지난 때였다. 어느 지역 책 읽기 모임에서 마련한 독자들과의 대화 자리에 초대 받아 참석한 일이 있었다. 10명 남짓 되는 독자들과 질의 응답을 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나누었다. 본 모임이 끝난 뒤 자리에 참석한 독자들 몇몇과 뒤풀이를 했다. 자리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데, 한 독자가 이렇게 말했다.


“정 선생님, 다음에 책 내실 때는 선생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 주세요.”


나는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을 펴내면서, 이 책이 가진 큰 약점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의 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책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주제의식이나 주요 서술 방향과 목적, 이를 위해 내가 취한 관점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는? 이야기 맛이 안 나는 글은 재미가 부족하지 않은가. 예의 독자의 요청은 바로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었다.


2


“중화권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라는 타이틀이 책 날개 저자 소개 문구의 첫머리에 박힌 주인공답게 글쓴이 양자오는 동서양과 고금의 재미난 이야기를 책 곳곳에서 들려 준다. 글쓴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책”이다. 


이야기의 장점을 설파하는 이 책의 주제가 식상할지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경부터 ‘서사’니 ‘스토리 텔링’이니 하는 말이 붙은 책을 얼마나 자주 보았는가. 이 책은 특장점은 독자가 이야기의 맛과 매력을 글쓴이가 들려주는 진기한 이야기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느끼고 깨닫게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글쓴이가 이야기와 관련해 다루는 첫 번째 주제는 “이야기는 현실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하다”이다. 이 주제를 풀어 가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전날의 섬》에 나오는 “여섯 번째 섬” 주민의 이야기가 소환된다. 


소설 속 여섯 번째 섬은 ‘이러쿵저러쿵 섬’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다. 그곳 주민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에 관한 한가한 잡담이 말하는 내용이다. 주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과 의의는 남의 입에 올라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 섬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혹독한 벌은 아무도 그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남의 구설에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장치를 만들어냈다. 마을 광장에 설치한 거대한 바퀴다. 이 바퀴는 여섯 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동심원은 안에서 바깥으로 가면서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 각 동심원의 칸에는 동작(행위, 행동), 감정, 상황, 시간과 장소가 표시돼 있다. 


사람들은 바퀴의 동심원들을 돌려 이야기 조합을 만들어 낸다. ‘어제-도움-만남-원수-속임-병’ 표시 조합을 얻으면 “아무개가 어제 길에서 원수하고 마주쳤대. 전에 아주 못된 속임수를 써서 아무개를 쩔쩔매게 만든 놈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원수가 병이 났더래. 아무개가 오히려 원수를 도와줬다지 뭐야.” 이러쿵저러쿵 섬의 광장에 서 있는 동심원 바퀴를 돌려 얻을 수 있는 이야기 조합 수는 7억 2200만 가지다!


3


글을 쓰는 일은 일종의 노동 같은 것이다. 수미일관하는 주제와 완결된 구조를 갖춘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글쓴이는 계획을 세우고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를 분배하며 시간을 통제해야 한다. 영국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주석)이 해 뜨기 전 기상해 5시 반부터 8시 반까지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쓴 뒤 출근하고, 회중시계 하나를 앞에 두고 15분에 최소한 250자를 쓰는 규칙을 지킨 까닭은 자기만의 글쓰기 노동 규율을 준수함으로써 계속 글을 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트롤럽이 아니며, 이러쿵저러쿵 섬에 있는 동심원 바퀴도 없다. 그러나 이야기가 주는 힘을 조금이라도 알 수만 있다면 늦은 밤이나 조용한 커피집에서 자기의 고유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의 맛과 매력을 자연스럽게 알게 해 주는 이 책이 도움을 줄 것이다.



(주석) 앤서니 트롤럽은 사망 직후 언론에서 “영국의 영광”, “가장 위대한 소설가” 등의 극찬을 받았다. 이후 ‘트롤럽 열풍’이 식으면서 작품의 문학성을 저평가하는 비평이 널리 퍼져 사반 세기 동안 독자들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등 평가의 기복이 극심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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