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다르다
탕누어의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2020, 글항아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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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작가 탕누어가 쓴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은 표제 제목이 고리타분해 보인다.
문장 구조가 무미건조하다. 책의 주요 제재로 짐작되는 3개의 추상 명사와 책의 기조, 전개 방식 등을 함의하는 1개의 동사성 명사가 상투적인 학술논문 제목처럼 연결되었다. 마치 마감에 쫓겨 대충 급하게 지은, 대학 문예지 자투리 글의 제목 같다.
부제로 넣은 “무미건조한 세계에서 작가와 독자가 살아남으려면”은 문제가 없는가.
서점 매대에서 책을 집어든 독자는 이런 의문을 던질 것 같다. ‘이거 철학 책이야, 아니면 글쓰기 책이야?’ 부제 문장의 내용 의미가 표제를 뒷받침하지 않는가. 글쓴이의 집필 방향이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책이 내게 준 아쉬움은 여기서 그치자. 다른 아쉬움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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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뿌듯함이나 보람을 안겨 준 것들이다.
요약 발표나 대표 발제를 준비하려고 두꺼운 전공 서적류를 펼쳐드는 경우를 제외하고,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듯 새겨 읽는 일은 흔치 않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행간 문장들 바로 아래에 밑줄이 하나라도 그어진 쪽과 책의 주요 내용을 재차 확인할 때 쉽게 찾으려고 책면 모퉁이를 접어 놓은 쪽이 수십 장이다. 내가 읽은 보통의 평이한 책은 그렇지 않다. 기껏해야 수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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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강점이나 매력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하려고 한다.
첫째, 문장들이 좋다. 힘찬 듯 차분하고, 가볍게 농담하거나 냉소하는 듯 싶다가도(실제 오래됐거나, 대만 시중에 유행하는 유머와 농담이 자주 인용돼 있다.) 우리를 금세 따뜻한 성찰과 사유의 장으로 이끌어 들인다. 여러 절이 길게 이어져야 하는 대목에서 문장은 마땅히 길게 이어지고, 주제를 휘몰아치듯 인상적으로 매조지면 좋겠다 싶은 대목들에서는 문장이 짧게 처리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저자의 집필 기운이 변동하고, 문장을 뽑아내는 저자의 심리적 억양이 미묘하게 역동하는 흐름을 감지한다.
둘째, 글쓴이의 태도다. 인간 삶의 태도나 조건을 규정하는 핵심 요인(책 표제에 있는 명예, 부, 권력이 그것이다.)의 문제를 ‘발본’하려는 듯이 철두철미하게 파헤친다.
동문서답하거나 태산명동서일필 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책들, 소재와 주제를 수박 겉 핥듯 대충 건드리고 가는 책들이 많다. 이 책은 다르다.
부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자본주의 400년 역사와 그 배경으로서의 인간 삶의 심리, 역사를 동분서주하며 파헤친다. 당신은 부와 권력의 밀접한 관계와 부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과정을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류 역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이 책이 글쓰기와 책 읽기에 관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면(일부 독자는 철학책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언어관 유형(문장관, 문예창작관, 독서관 등등)의 이면에 공통적으로 깔린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을 성찰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다수 평범한 독자가 고민했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을 언어관이다. 글쓰기의 공공성, 책 읽기의 공공성 같이 표현되는 언어의 공공적 측면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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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어의 공공적 측면에 관한 저자의 굳건한 신념이 즐겁게 읽을 만한 문장들, 가슴에 깊이 새겨 두고 거듭 음미할 만한 사유와 성찰의 과정과 그 결과물들, 과거와 오늘날 사람들의 절망의 이야기와 파국의 종말을 향해 가는 듯한 인류 문명의 미래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희망과 의지를 생각하게 하는 멋진 결론의 토대가 되었다고 믿는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직접 찾아보기를 권한다.
0 탕누어 씀, 김택규 옮김(2020),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무미건조한 세계에서 작가와 독자가 살아남으려면》,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