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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l 28. 2016

민주주의 정치 ‘제1 매뉴얼’: 가만히 있지 말라

정치적 평등과 쟁취하는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평등’이다. 정치적 평등은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지향해야 할 핵심 목표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수사와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2014) 미국 예일대학교 스털링 명예교수는 최후의 저작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에서 그 대표 사례로 미국을 들었다. 다음은 미국 <독립선언서> 두 번째 문단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달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의 주요 작성자였다. 그는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생전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았다. 죽을 때 다섯 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게 전부였다. 미국 노예제는 이후 87년이 지난 뒤 군사력(남북전쟁)과 수정헌법을 통해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독립선언서> 기초자들과 1776년 7월 제2차 대륙회의에서 독립선언서 채택에 찬성했던 55명의 대표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여성에게까지 확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당시 여성은 법률에 따라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노예제 폐지 이후, 미국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효과적으로 행사하기까지는 다시 100여년의 걸렸다. 노예제의 여파는 지금까지 미국 흑백 갈등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달에 따르면, 세계 성인 남성 인구 대다수는 19세기 말, 심지어 20세기까지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 1920년대 이전 총선에서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민주적인’ 국가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뿐이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여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총선에서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 스위스에서 남성 보통선거권은 1848년에 부여되었다.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이 없었다.    


2    


그러나 로버트 달 교수는 정치적 평등을 포함해 평등을 요구하는 힘들이 다양한 제도, 관습, 실천을 통해 점점 강화되어왔다고 주장했다. 달에 따르면 그러한 힘들이 가장 증폭되었던 시대는 20세기였다. 그것은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였다.    


1900년 당시 완전하거나 어느 정도 독립국으로 인정할 만한 나라는 48개국이었다. 이들 가운데 단지 8개국만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제도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중 뉴질랜드만이 여성의 선거권을 보장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 8개국은 세계 인구의 10~12퍼센트에 불과했다. 21세기 초인 오늘날 190여개국 가운데 약 85개국이 보통선거권을 포함해 영국이나 서유럽, 미국과 비교할 만한 수준의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치제도와 실천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 국가는 오늘날 세계 인구의 거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로버트 달, 위의 책, 35~36쪽.    


사회적 ‘귀족’과 특권층이 거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정치적 평등을 향한 변화는 단계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진다. 달이 정리한 개요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특권은 교의(doctrine)를 통해 정당화된다”. 한 사회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은 정당화하는 교의에 경도되거나 이를 사회에 강요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럽에서 수세기에 걸쳐 군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왕권신수설’이 그 예다. 위계구조와 특권이 공식 철학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하는데, 중화제국의 유교가 그렇다. 교조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전체주의 체제도 마찬가지다.    


“엘리트 지배에 대한 하층계급의 회의주의”. 우월 의식에 가득한 특권층은 하층계급이 교의를 정당한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실제 많은 하층 집단은 이들 특권계급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열등한 지위’의 정당성을 의심한다.    


“좀 더 호의적인 조건”. 이념, 믿음, 구조, 세대 등의 일정한 조건이 변하게 되면 하층 집단 사람들은 특권층(의 교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갖는다.     


“변화에 대한 압력의 증가”.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하층계급이 분노와 원한, 불의에 대한 인식, 여타 동기들의 작용 아래 변화를 향한 힘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지배 계층 내부에서의 지지”. 도덕적 양심, 동정심, 기회주의,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재산권과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위협, 혁명의 현실적・잠재적 가능성 등의 이유로 지배 계층 구성원 가운데 하층계급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피지배 계층의 성취”. 하층계급에서 권력, 영향력, 지위, 교육, 소득, 기타 다른 이익들에서 성과를 얻게 되는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로버트 달을 따라 가장 민주적인 국가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국가에 이르까지의 순위 분포를 정리한 결과를 참조했으면 한다. 두 시기(1985년과 2000년)에 걸쳐 120여개국의 민주주의 정도를 비교한 것이다. 기준은 네 가지다. ▲ 자유롭고 공정한 주기적 선거 ▲ 표현의 자유 ▲ 대안적인 정보 원천: 시민이 공직자의 의견보다 다른 의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 ▲ 결사의 자유: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들이 정치 활동을 조직하고 활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1순위에 속하는 국가들이 1985년에 10개국에서 2000년 26개국으로 2.5배 이상 늘었다. 2순위(8개국→15개국), 3순위(1개국→25개국), 4순위(13개국→16개국), 5순위(10개국→13개국) 모두 크게 늘었다. 그와 정확히 반대로 하위(비민주적인 국가) 순위인 6~10순위는 크게 감소했다. 최하위 10순위는 27개국에서 9개국으로 줄었다.    


3    


민주주의는 ‘희망적’인가. 달 교수가 주목한 통계와 전혀 다른 것도 있다. 2010년 <이코노미스트>의 ‘2010년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Democracy Index 2010)>’[이하 관련 내용은 노닐다짱구패 엮음(2016),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산다>, 노딜다, 218~219쪽 참조]는 세계 167개국의 민주주의 실현 정도를 ‘선거 절차와 다원성, 시민의 자유, 정부의 기능, 정치적 참여, 정치 문화’ 등 다섯 가지 기준에 따라 60개 항목으로 평가하여 ‘완전한 민주주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 ‘혼합된 체제(민주주의+독재 체제)’, ‘독재 체제’로 분류한 결과를 싣고 있다. 아래 표가 그것이다.

                       

[노딜다짱구패 엮음(2016), 위의 책, 219쪽에서 가져옴.]


2010년 오이시디가 낸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 제목은 <민주주의의 후퇴(Democracy in retreat)>였다. 보고서는 공정한 선거와 시민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만 완전하고 견고한 민주주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정부와 민주적인 정치 문화를 토대로 충분한 정치적 참여가 병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견고한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한 국가에서도 충분히 보살피고 방어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언제든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민주주의는 결코 최종적 성취는 아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노력, 계속적인 희생, 그리고 의지에의 소명이요, 필요하면 그것의 방어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이다”라고 말했다. 메이어 런던은 “민주주의란 완전무결주의가 아니라 개선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양심이 될 때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태초에 정치가 태어날 때 거짓말로 태어났다. 나는 하늘이 내려보낸 사람이다. 여기서 정치가 태어난 것이다. 민주주의 역사는 그 거짓말에 속아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해왔던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에 대해 믿음을 갖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자각을 갖고 그 거짓말에 대항해온 역사이다. 거기서 민주주의가 싹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모든 이들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한 가지다.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없다! 독재 정치는 가만히 있는 자들로 만들어진다. 민주주의는 싸워 얻어내는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 인물은 로버트 달이다. 한국어 <위키 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EC%95%A8%EB%9F%B0_%EB%8B%AC)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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