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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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봄비 같은 겨울비가 연일 내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강원도에서는 대관령을 기준으로 한쪽에서는 폭우가 한쪽에서는 폭설이 쏟아졌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12월답지 않게 날이 포근해 이유 없이 낭만적인 감성에 젖어들기도 하는데, 한편으로 우리 별 지구가 고장이 난 신호처럼 보이기도 해서 가슴 한 편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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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침 8시 전후에 출근합니다. 차에서 내려 현관을 지나 두 개 층 계단을 따라 3층에 자리한 1학년 교무실로 들어섭니다. 그 짧디짧은 거리에서 거의 매일 두 학생을 만납니다. 학년 초부터 교내 봉사활동을 자원하여 계단 청소를 하는 학생들입니다.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아, 안녕. ○○이 이렇게 깨끗이 청소해 주는 덕분에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구나. 항상 고맙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학생들은 몸을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비키면서 한결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을 지나면서 학생들이 흡사 수도승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양손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런히 쥐고 층계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쓰레기와 흙모래를 구석구석 빈틈없이 쓸어 내리고 담는 동작을 묵묵히 되풀이하는 모습이 흡사 경건하게 참선하거나 기도하는 종교 수행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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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뫼비우스의 띠’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August Ferdinand Möbius, 1790~1868)라는 독일 수학자가 만든 뫼비우스의 띠는 안쪽과 바깥쪽의 구분이 없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띠의 한 면 위 특정 위치에서 선을 그어 나가면 처음 출발했던 위치에 도달합니다.
소설가 조세희(1942~2022) 선생님이 쓴 연작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첫 번째 작품이 <뫼비우스의 띠>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뫼비우스의 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되지 않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묘한 감정과 생각에 휩싸였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의 삶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시간의 길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합니다. 안쪽과 바깥쪽이 없다는 것, 또는 처음과 끝이 없다는 것이, 마치 우리 세상이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표면과 심층의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존재함을 뒷받침하는 증거처럼 다가옵니다.
두 ○○ 학생이 학년 시작 시점부터 펼쳐 온 청소 봉사 활동은 이제 학년 말 종업식과 함께 마무리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한 해 수도승처럼 지켜 온 계단 쓸기의 기억이 몸과 마음 곳곳에 강하게 새겨져 그들이 또 다른 경험을 맞이하는 데 시작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강하게 합니다.
시간에 경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가 겪는 경험의 경계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계속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이치를, 그리하여 흔히 한 해의 끝이거나 끝을 향해 간다고 표현하곤 하는 이 12월이 언제든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삶과 경험의 시작점임을 머리에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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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곧 끝이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지만 삶의 진실이나 진리의 한 조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역설적인 지혜의 묘미를 안겨 줍니다.
지난 4월의 담임 편지에서 인용한 맹자(b.c.372~b.c.289)의 말 “人有不爲也而後 可以有爲(인유불위야이후 가이유위)”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는 데[有爲] 하지 않음[不爲]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일단 하고 보아야 한다는, 현대 사회에 두루 통용되는 행동주의적 관점의 한 측면을 조용히 돌아보게 합니다.
흔히 알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앎임을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을까요. 어떤 앎은 절대적이고 불변적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앎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행동과 실천의 전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는 대로 실천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백범 김구(1876~1949) 선생님이 남긴 다음과 같은 휘호 두 가지를 글에서 자주 인용합니다.
가. 知難行易(지난행이)
나. 沓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蹟(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적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기는 발자국이 훗날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가’는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쑨원(孫文, 1866~1925)이 남긴 말이고, ‘나’는 서산 대사(1520~1604)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휴정 대사가 지은 한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형식과 내용이 사뭇 다른 이 두 말을 이음동의어처럼 이해합니다. 세상 일을 제대로 알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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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동료 학생과 갈등 관계에 놓인 학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눌 때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3초간 생각하라.”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합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생 사안 중 많은 부분이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고의 집입니다. 말과 행동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바가 반영된 결과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어떤 문제에 대한 생각이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할 때 자주 듣는 표현이 ‘그냥’이라는 부사어입니다. ‘그냥’은 무변화를 전제로 한 지속성이나 무조건성과 같은 의미 자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행동 중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성되는 말이나 행동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요.
누군가 무심결에 하는 말이나 행동처럼 보여도 거기에는 자기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의도, 동기, 목적이나 목표, 방향성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평소 우리가 중히 여기는 삶의 관점이나 태도,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관이나 철학에 터를 잡고 있을 것입니다. 엄중히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말과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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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몇 도를 넘는 날과 한파에 폭설이 뒤섞인 날이 널뛰기를 하듯 어지럽게 오가고 있는 연말입니다. 여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탄과 세밑 시간을 그렇게 차분하고 평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3년 12월 18일 월요일
군산영광중학교 1학년 1반 담임 정은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