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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이후 6년 만에 문집을 낸다. 오랜만이다. 2007년 처음 문집을 내면서 느꼈던 설렘과 기대감 비슷한 감회를 느낀다.
교직에 들어서고 일곱 째 되던 해인 2007년부터 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발간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학년 수업은 문집을 내지 않은 2018년 이후에도 계속했으므로 문집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작업을 진행했다면 문집 발행을 중단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굳이 핑곗거리를 대자면 그 사이 학생폭력이나 생활지도 사안 전담 등 물리적인 시간 여유를 찾기 힘든 일들을 업무로 맡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학급 담임을 맡지 못한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문집을 내지 않은 지난 6년 동안의 학년 말 시간을 찜찜하게 보냈다는 사실을 우선 고백해야겠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들의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끝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허전함이나 상실감도 컸다. 학생들이 이런저런 수업 활동 중에 써 낸 글들이 문집에 담기지 못하면 영영 다시 만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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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1학년 담임과 대표 교사를 맡아 처음부터 힘주어 말한 것이 ‘학년 정체성’이었다. 그간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학년 시작 시점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학년 정체성이 그 학년이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나는 학년 초에 만들어지는 건강하고 긍정적인 정체성이 학생들의 학교 생활 전반에 선순환의 계기이자 출발점이 된다고 생각했다.
‘경계 세우기’에도 특별한 공을 기울였다. 말과 행동의 경계를 잘 세우는 것만으로 학교 생활이 평화로워진다.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는 생활교육 사안의 태반이 경계를 벗어났거나 잘 모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다. 그래서 학년 초 수업 시간에 경계 세우기에 관한 특별 수업을 실시하고, 생활교육 차원의 대화를 나누면서 경계 세우기를 강조했다.
올해 1학년은 최고였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올해 만난 1학년 학생들이 지난 23년의 교직 경력 동안 만난 학생들 중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학생들 스스로 우리 학교에 입학해 공부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자세가 학년 정체성과 경계 세우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학생들에게 1학년 모든 선생님을 대신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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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문집에는 학생별로 4편의 글을 담았다. 5월에 은파 호수 공원으로 현장 체험 학습을 가서 점심 식사를 먹으며 쓴 소풍 소감 글이 첫 번째이다. 길지 않은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학생들은 평범하고 단조로운 체험 학습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한 문장들로 전해 주었다.
1학기 말 금연 교육 주간에 학급 교실에서 쓴 금연 글쓰기 행사 글이 두 번째이다. 학생들은 설명하는 글과 주장하는 글 외에 다수의 소설과 수필 형식을 빌려 금연 글을 썼다. 여느 해 실시한 금연 글쓰기 행사 때보다 내용과 형식, 질과 양 측면 모두에서 괄목할 변화를 보여 주었다고 자평해 본다.
세 번째 글은 2학기 개학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쓴, 학년 민주 시민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실시한 저자에게 쓰는 편지 글이다. 학생들은 방학 중 과제로 민주 시민 교육과 관련한 책 한 권을 읽은 뒤 책의 저자에게 편지를 쓰고 초청 특강에 참여하는 일련의 활동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교실 책상에 앉아 편지지에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편지를 썼다. 나는 122편의 편지를 모두 모아 특강을 하러 온 저자 황규성 한신대학교 교수에게 그대로 건네 드렸다. 며칠 뒤 황 교수님이 답장 삼아 보내 준 장문의 이메일을 학생들과 공유했다. 그 모든 경험이 학생들 모두에게 각별하게 다가왔으리라 확신한다.
마지막 원고는 2학기 개학 직후 실시한 백일장 행사에서 쓴 글들이다. 나는 ‘무지개, 함께, 100년 뒤, 그리운 얼굴’ 등 제제로 제시한 여러 낱말과, 학생들이 이들 낱말을 보며 떠올린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들여다보면서 2023년을 13살의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서 동세대감을 진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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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실린 글들은 모두 학년 전체 행사나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실시한 글쓰기 시간에 쓰였다. 따라서 이 문집은 학급 문집이나 교과 문집이 아니라 학년 문집의 성격을 갖는다.
나는 11월 말부터 원고를 모으기 시작했고, 약 한 달간 기본 편집 작업과 교정 작업을 했다. 어제 122명째 학생 글을 손보았고, 오늘 아침 머리말 마지막 문장을 씀으로써 내 손에서 이루어지는 문집 발간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 1차 편집본을 인쇄소에 보내고 나면 지난 1년간 학생들이 보낸 자잘한 역사가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책은 책이다. 물건이자 물체이면서 단순한 소통 도구일 뿐이다. 다만 그것이 내 삶의 시간 한 조각이나 내 생각의 조그만 흔적을 담고 있다면 단순한 물건이나 물체나 도구의 위상을 뛰어넘는다.
우리 삶과 생각은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 이어지지만 그것을 붙잡아 두는 것이 무언가가 없으면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 책은 그런 우리의 삶과 생각을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붙잡아 두는 마력을 발휘한다. 우리 학생들이 이 책을 그런 존재로 간직했으면 좋겠다.
2023년 12월 25일 성탄절 늦은 아침에
1학년 대표 교사 정은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