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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20. 2024

갑질의 미학

1


후두부 9부 능선까지 올라온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장 몇 개면 충분하다. 그것을 그 9부 능선 위로 치솟게 하여 뱉어 내면 묵은 변 토해 낼 때와 같은 시원함과 쾌감이 생길 것 같았다. 


그게 잘 안 됐다. '갑질'이라는, 오늘날 인간관계상의 거의 모든 것을 무화하고 상쇄해 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놈이 앞을 가로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목하 우리는 갑질이라는 언어 기호로 표상되는 무기를 막을 적절한 방어 수단이 없다.


2


이즈음 나는 학교 선후배나 동료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을 느낀다. 메시지 전달 자체에 주목하고, 메시지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건조하게 표현하려고 신경을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판단이다. 상대가 내 말에서 갑질의 낌새를 느끼는 순간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3


어느 곳엔가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오늘 "논어" 한 대목을 읽다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게 되는 구절을 만났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 제12편 '안연' 제16장


4


이른바 갑질이, 군자가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아름다운 말이나 행동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진짜 (공자가 말한) 군자가 되어야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경지에 오르게 되면 진정으로 바람직한(?) 의미의 갑질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내 후부두의 9부 능선에 머무르고 있는 몇 마디 말을, 미학적으로 토해 내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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