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의 사생아

공자 선생님, 이것이 교육입니까? (3)

by 정은균

기록으로 전해 오는 공자의 탄생담에 얽힌 이야기들에는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숙량흘은 이미 칠순을 넘긴 노인이었다. 사마천은 숙량흘이 안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기록하였는데, 보통 위대한 성인에게 따라붙는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느낄 만한 이야기다.


문제의 말 뒤에 숨은 속된 의미와 무관하게 야합은 오늘날 공자 부모가 정식 혼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부부가 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정리된 듯하다.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세 딸이 있는 집안에서 그것도 가장 어린 막내딸이 야합으로 표현되는 비정상적인 결혼에 기꺼이 응한 까닭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안징재는 겨우 십대 소녀였다. 혹시 구혼을 한 남자가 군왕의 후손에 십 척의 훨씬한 키와 굳센 힘을 가진 매력적인 스펙을 가졌다는 사실에 홀렸을까.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의혹에 대한 해법을 색다른 시각에서 풀어낸 사람은 현대 일본의 마지막 석학으로 불리는 한문학자 시라카와 시즈카였다. 그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하는 공자 집안의 이야기나 공자의 출생담이 모두 허구라고 단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보기에 《사기》에서 공자의 생애를 다룬 〈공자세가〉는 《사기》 안에서도 가장 부정확하고 틀린 데가 많은 편이다. 다른 세가나 열전, 연표 등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연대기적인 일이나 사실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곳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사기》에 기록된 공자의 가계는 서로 무관한 이야기를 꿰맞춘 “이상한 족보”이자 모두가 허구이다. 시라카와 시즈카가 말하는 진실은 이렇다. 공자는 이름 없는 무녀의 사생아로 일찍이 고아가 되어 비천하게 성장했다.


《순자》 〈비상〉 편에는 공자가 키가 크고 얼굴이 몽기(蒙倛) 같다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몽기는 나자(儺者)인 방상씨가 쓰는 귀신 쫓는 탈로, 역병을 물리치거나 장례를 치를 때 쓴다고 한다. 공자의 생김새에 관한 묘사 중에 정수리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갔다는 말이 유명한데, 이 또한 몽기의 얼굴 생김새와 관련 있는 전승이 반영된 것이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공자가 무녀의 아들이었고, 무축(巫祝) 집단의 언저리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말한다.


노령의 남편과 손녀뻘 되는 아내의 조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공자는 숙량흘 부부(?)가 이구산(泥丘山)에 빌어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숙량흘이 이산으로 간 것이 그곳에 무당들이 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고, 안징재는 그곳에 있던 무녀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야합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터인데, 그렇더라도 정식으로 결혼했더라면 야합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로 대표되는 유(儒)의 원류를 무사(誣史)와 연관짓는 논의도 흥미롭다. 우리가 유학이나 유교 같은 말을 들을 때 부지불식간에 맨 처음 떠올리는 생각은 이것들이 공자가 최초로 만들어낸 학문이나 종교적 신념 같은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공자가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의 토대 아래에는 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오랜 전통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儒는 기원적으로 需에서 이어졌다. 유교철학자 김경일의 연구에 따르면 인(亻)과 수(需)가 합쳐진 儒라는 글자는 상대 갑골문, 서주와 춘추시대의 청동기, 전국시대의 죽간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글자이다. 당시에는 儒의 초문이라고 할 수 있는 需만 있었다. 需는 초기에 비를 부르는 주술사 신분을 가리키는 문자로 쓰이다가 점차 적자의 의미를 함축하면서 귀족계층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역사상 儒가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설문해자》가 출현한 한(漢)나라 때였다. 《설문해자》에서 儒는 부드러움[柔]이나 술사(術士)를 지칭하는 말로 소개되어 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상용자해》(2012, 2021)에서 儒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需는 雨와 而(머리털을 잘라 상투가 없는 사람의 모양)를 조합한 모양으로 巫祝(무축, 신을 섬기는 사람)을 말한다. 가뭄 때 무축이 祈雨를 하는 것을 需라고 하는데 비를 구하고(需), 기다린다(需)는 뜻이 된다. 그 기우를 하는 무축을 儒라고 한다. 儒者의 옛 모습은 기우에 종사하는 하급의 무축이고 유복한 집의 장의를 맡은 장의사였다. 그러한 계층의 출신인 공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길을 추구해 대성하여 儒敎, 儒學을 개창했다. (709쪽)


사마천이 〈공자세가〉에 기록한 공자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공자가 제기 그릇을 앞에 펼쳐 놓고 예를 행하는 놀이를 하며 지냈다는 짧은 문장 한 토막이 전부다. 사마천이 〈공자세가〉에 이 기록을 남긴 이후로 공자의 조두 놀이는 공자의 전기에 관한 글에 빠지지 않는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어린 공자의 제기 놀이 일화는 장성한 뒤 예(禮)의 대가처럼 이름이 알려지는 공자의 ‘(될 성 부른 나무의) 떡잎’ 시절을 대변하는 이야기로 해석되곤 하는데, 정작 우리는 어린 공자의 소꿉장난 마당에 제사에 쓰이는 그릇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게 된 ‘배경’에는 주목하지 않은 듯하다. 무축 집단, 주술사, 장의사 등에서 이어져 온 공자 집안의 가계도는 낯설게 다가오지만 공자가 펼쳐 보인 생애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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