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과 철학에 충실한 ‘평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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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은 ‘시험(試驗)’을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로 풀이한다. 학교에서 유의어처럼 쓰이는 말로 ‘고사(考査)’가 있다. “학생들의 학업 성적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뜻풀이가 사전에 올라 있다.
그런데 사전에서 ‘고사’ 의 뜻풀이 자리 첫 번째는 “자세히 생각하고 조사함”이 차지하고 있다. ‘고사’의 본래적인 의미가 ‘시험’이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조그한 단서로 볼 수 있을까.
일본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의 모임인 역사교육자협의회가 쓴 <학교사로 읽는 일본근현대사>(2014, 책과함께)라는 책에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시험’과 ‘고사’의 관계가 우리 상식과 크게 다르다.
일본에서 학교교육의 제도로 ‘시험’이 도입된 것은 1872년 <학제>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소학교는 하급과 상급으로 나누어 각 4년씩 총 8년을 수업 연한으로 하는 과정으로 편성됐다. 각 과정은 1~8급까지 ‘등급’(‘학급’이 아니라 일종의 능력별 반 편성이라고 함.)이 구분되었는데, 반년마다 한 등급을 수료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때 ‘시험’이 등급 판정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890년 교육칙어가 제정되면서 충량한 황국신민 육성을 위한 덕육(德育)과 강병 육성을 위한 체육(體育) 교육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지육(知育) 중심의 시험제도가 약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시험제도에 의한 과도한 경쟁이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교육 목표와 모순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학급편성을 등급제에서 ‘학급’, ‘학년’제로 전환하고, 시험 목적을 ‘교수상의 참고’와 ‘졸업인정’으로 한정하는 조치(1891년)가 취해졌다. 시험에서 석차를 내는 것이 금지되고(1894년), 졸업인정을 위한 시험도 폐지되었다.(1900년)
시험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각 학년 과정의 수료’, ‘전교과의 졸업’을 인정했을까? “아동의 평소 성적을 고려해서”(1900년의 소학교령 시행 규칙) 정했던 것이다. ‘고사’라는 용어가 시험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태도나 행동 등 인격 면을 중시하는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 학적부의 학업성적란에 수신, 국어, 산술, 체조와 함께 조행(操行; 일상의 행동)란이 설정된 것이 그 전형적인 경우이다. - 역사교육자협의회(2014), 위의 책, 210쪽.
역사교육자협의회의 기록에 따르면 시험과 고사는 유의어로서보다는 반의어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시험은 말 그대로 경쟁 시스템에 기반해 학생들을 서열화하고 선별하는 평가 도구로 기능했다. 고사는 학생의 태도, 행동 등 정의적 영역을 평가함으로써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시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원칙적으로 서로 보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은 거의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학교제도, 교육과정, 수업방식, 학교 안 잠재적인 교육과정의 기저에 ‘일본’이 있다. ‘시험’과 ‘고사’에 관한 ‘어휘의미’의 통시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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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고사를 글머리 화제로 꺼낸 까닭이 있다. 학교교육에서 평가의 ‘정치학’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시험과 고사 모두 학생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일상의 언어 생활에서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쓰는 이들 말이 근본 뿌리와 출발점이 달랐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우리는 시험을 볼 것인가 고사를 수행할 것인가.
누가 무엇으로 왜 평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속에 (시험이든 고사든) 평가 철학과 평가 방향, 구체적인 평가 방법과 평가 도구 등 평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형빈은 최근작 <교육과정-수업-평가,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2015, 맘에드림)에서 특정한 평가 방식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대학입학고사는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핵심 원리로 하는 ‘테일러-포드주의 시스템’을 반영한 방식으로, 수능이나 논술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기반한 ‘포스트-포드주의 시스템’을 반영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원칙적으로는 수능이나 논술을 ‘포스트-포드주의 시스템’과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형빈의 주장대로 수능이나 논술이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교육 시스템 아래서 ‘다품종 소량생산’과 ‘포스트-포드주의’에 제대로 부합하고 있는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수능은 당연하고 논술마저도 ‘정답 찾기’식 붕어빵 학습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형빈은 현재의 평가 관행을, 평가 결과로 나타나는 ‘분리’와 평가를 통해 실현되는 ‘통제’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분리는 평가 결과로 학생들이 어떻게 나뉘는가의 문제이므로, 분리가 강한 평가는 학생들의 차이를 명확히 재는 데 관심을 둔다. 성취 정도보다 석차에 관심을 두고, 단편적인 지식을 물으며, 시험 범위가 많거나 난도가 높고, 학생들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항이 다루어진다.
반면 분리가 약한 평가에서는 석차보다 학생들의 성취 정도에 관심을 두고, 지식 습득 여부보다 다양한 자질과 역량에 관심을 둔다.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으며, 시험 범위가 상대적으로 좁다.
통제가 강한 평가는 학생들을 하나의 틀(frame)에 가둔다. 이미 정해진 하나의 답을 찾는 것을 중시하고, 동일한 시간에 모든 학생이 동일한 문항으로 평가받는다. 평가를 치르는 방식이 엄격하고, 평가를 무기로 학생들을 통제한다.
거꾸로 통제가 약한 평가에서는 정답의 개방성이 보장된다. 일회적・일제식 평가보다 교사별・상시 평가에 초점을 맞추며, 평가를 치르는 방식이 자유롭다.
분리와 통제 중심의 평가가 학생의 성장을 돕고 잠재력을 키우는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보는 교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하나의 정답을 찾게 하고, 상대적인 석차를 중시하는 평가가 미래 핵심 역량이라는 공감력, 협동력,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학교와 교사는 왜 이토록 변화가 더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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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평가의 ‘억압’ 시스템 아래 포박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억압을 보려 하지 않는다. 보지 못한다. 이유가 있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의 대모로 불리는 마릴린 프라이(Marilyn Frye)는 <리얼리티의 정치학(The Politics of Reality)>에서 오늘날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새장’ 은유를 활용했다. 보이지 않는 억압의 일반적인 기제를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예로 보인다.
새장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면 새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눈길을 움직여 철망의 철사 한 줄을 보아도 다른 철사가 보이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새장 철망은 보기 힘들다. 이런 조건이라면, 비록 실제로는 시야의 한계에 따른 지각 착오이긴 하지만, 새가 철사 한 줌을 피해 날아갈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대신 뒤로 물러서서 더 넓은 시야로 보면 이 철사들이 한데 합해져서 교차하며 새가 달아나지 못하게 막는 패턴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새가 조직적으로 짜인 장애물의 연결망에 둘러싸여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오즐렘 센소이・로빈 디앤젤로(2016),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 착한책가게, 97~98쪽.
학교와 교사, 학생과 학부모 모두 평가 과정과 결과가 공히 공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한 공정성 압력 때문에 모든 절차에서 실수나 착오가 용납되지 않는다. ‘정답이 열려 있는 평가’, ‘이것도 답 저것도 답’ 식의 평가 역시 불공정성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평가 방법이, 그 자체로 정답에 해당하는 어떤 사실을 쉽게 확증할 수 있도록 ‘객관성’이나 ‘공평무사함’으로 포장된 선다형 문항으로 기울어지게 된 이유다.
문제는 평가가 기껏 ‘시험’을 통해 석차를 매기거나 등급을 주는 데 주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평가의 본질은 학생들의 성장을 돕고, 그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부족하거나 보완해야 하는 면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확인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교사가 있을까.
‘시험’을 벗어나 ‘고사’ 본연의 의미에 걸맞는 학생 성장 평가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우분투’[UBUNTU; 아프리카 반투(Bantu)족 말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야기 속 현실을 꿈꿔 본다.
아프리카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가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제안했다. 나무 옆에 맛있는 과일 한 바구니를 놓고 “가장 먼저 바구니에 도착한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과일 바구니에 도착한 아이들은 함께 둘러앉아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1등에게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죠?”
아이들은 ‘우분투’라는 단어를 함께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겠어요?” - 정창규・강대일(2016), <평가란 무엇인가>, 에듀니티, 103쪽.
* 제목 커버에 있는 배경 이미지는 넬슨 만데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다. 평소 ‘우분투’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사진은 한국어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B%B6%84%ED%88%AC_(%EC%82%AC%EC%83%81))에서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