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Aug 10. 2016

‘요즘 아이들’ 담론과 청소년 공포증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하여

1    


‘요즘 아이들’. 마법 같은 말이다. 아이들을 둘러싼 문제의 배경과 원인과 조건과 이유의 대다수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아이들을 품지 못하는 교사는 무책임과 무능의 비난에서 벗어난다. 끊임없이 개입해 잔소리하는 부모들은 내면의 숨겨진 욕망을 교묘히 은폐한다. 소위 ‘문제’ 있는 아이를 ‘요즘 아이들’ 담론으로 분석하는 순간 자신들의 책무와 책임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다.


10대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을 돌아본다. ‘요즘 아이들’로 살아가는 10대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중2병’, ‘괴물’, ‘급식충’, ‘등골브레이커’이라는 말들이 있다. 미성숙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환자’, 혼돈 속에서 ‘어른’에게 도발하는 골칫덩어리, 사회와 제도에 빌붙거나 부모 등골을 빼 먹는 존재라는 시각이 담겨 있다. 그럴까.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의 면면을 떠올려 본다. 개념 없이 아이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적인 이가 없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교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들 세상 물정 알 만큼 알고, 상식과 일상의 도리에 맞게 교사 생활을 하며 사시는 분들이다. 그런 ‘착한’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왜 ‘괴물’이 되어 ‘도발’하는 걸까.


학교는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굴러간다. 한 학기 17주, 평일 하루 7교시(중학생 기준) 수업 원칙은 아마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철칙 같은 것이 돼버렸다. 이 질식할 것 같은 시스템에서 이른바 ‘괴물 중딩’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 줘야 할 가정 또한 학교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부모들의 최대 관심사는 성적이다. 아이에 대한 모든 고민과 걱정은 점수와 진학 문제로 수렴한다. ‘공부해라, 학원 가라’는 ‘잔소리’가 대화의 주인 노릇을 한다.


아이들은 공부‘도’ 하는 아이가 아니라 공부‘만’ 하는 아이, 무엇이나 ‘멋대로’ 하는 아이가 된다. 어른들이 보기에 ‘괴물’의 형상이 비쳐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아이들은 고통 속에서 시들어간다. 많은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모가 골라 준 학원과 과외 현장에서 고통을 겪는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힘들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얻게 되는 짜릿한 성취의 즐거움이나 실패의 아픔을 잘 모른다.

 

삶과 배움이 점점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학교는 ‘고문실’이 된다. ‘괴물’이 되거나, 무력하게 순응하는 ‘착한 아이’가 되거나, 게임이나 춤 같은 다른 무언가에 대해 광적인 ‘추종자’가 된다.   

 

2    


‘요즘 아이들’ 담론에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배경 담론들이 숨어 있다. 청소년 미성숙론. 아이들은 어떻게든 성숙해져야 하는 존재다. 갖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자아에 대한 탐구와 헌신으로 정체감을 갖게 하거나(사회심리학), 적절한 보상과 처벌로 지적・도덕적 반응을 유도하거나(행동심리학), 청소년의 창조적 능력을 인정학 그들 자신에게 인격형성의 책임을 부여하거나(인간주의), 가족・학교・전체사회 등 다양한 사회 체계들에서 적절한 환경을 구축하는(맥락주의)”[김성윤(2014), <18 세상], 북인더갭, 201쪽.] 등의 ‘처방전’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의 청소년 담론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 아니라 세상(어른, 사회)의 필요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떨까.  청소년 문제를 다뤄 온 김성윤은 '요즘 아이들' 담론 같은 청소년 관련 담론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청소년은 왜 밝혀져야 하고 그들의 문제는 왜 해결돼야만 하는가. 당연하게도, 그래야만 현재의 정치・경제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대중정치가 시작되면서 거의 모든 인구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게 된 현대의 정치학을,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더불어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을 요구하는 현대의 경제학을 숙고하도록 하자. - 김성윤(2014), 위의 책, 201쪽.    


3    


‘관리되는 청소년’이라는 논지를 뒷받침하는 방증을 10대의 우울증 담론에서 찾아보자. 최근 5년 사이 청소년 우울증이 15.3퍼센트, 청소년 우울증 증세 중 하나인 수면장애가 56.4퍼센트 늘었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성정’이나 ‘태도’가 원래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시선은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우울증은 뇌 생리의 문제일뿐더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질병의 성격이 있다는 것. 이를 전제로 할 때 10대의 불안심리를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아이들의 우울증 주변에 깔려 있는 사회적 측면을 개인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문제의 역사적 내용은 빠지고 오로지 개인의 행동만 남는”(김성윤, 위의 책, 206쪽) 사태가 벌어진다.


청소년 담론의 정치성을 강조하는 김성윤의 논변은 10대들의 ‘질병’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장으로 이어진다. 근거가 있을까.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 곧 ‘ADHD’와 관련하여 김성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에이디에이치디 약식 테스트에 따르면 18가지 항목이 있다고 한다. ‘부주의로 실수를 잘함’, ‘집중을 오래 유지하지 못함’,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못함’ 등이 ‘주의력 결핍’ 패턴 증세다. ‘손발을 가만 두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계속 꼼지락거림’, ‘마음대로 자리를 뜸’, ‘질문이 끝나기 전에 불쑥 대답함’ 등이 ‘과잉행동/충동성’의 증세들이다. 이런 증상들의 다수(각 패턴에서 6가지 이상)가 6개월 이상 지속되면 에이디에이치디로 규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2012년 독일 <슈피겔>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에이디에이치디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레온 아이젠버그(Leon Eisenberg)가 죽기 7개월 전 “에이디에이치디는 허구적인 질병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디에이치디라는 질병을 만든 대가로 제약회사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펀드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제약회사는 왜 그에게 돈을 줬을까. 전문가들에 의해 질병이 만들어지면 환자가 생기고 제약회사는 약물치료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성윤(2014), 위의 책, 209쪽.    


김성윤에 따르면 우울증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질병’이다. 고대에는 우울증이 현대처럼 뇌 질환으로 취급되었다. 중세시대 우울증은 신에게 버림받은 표시였다. 신의 구원과 은총으로부터 배제된다고 본 우울증 환자가 ‘이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르네상스기에는 우울증에 따른 ‘낙담’이 ‘통찰력’으로, ‘나약함’이 ‘예술적 상상력과 복잡한 영혼의 대가’로 여겨졌다. 17~19세기 이후 현재까지 우울증은 다시 뇌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기실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토머스 암스트롱은 <주의력 결핍 장애 아동이라는 신화(The Myth of the A.D.D. Child)>(1997)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오즐렘 센소이・로빈 디앤젤로(2016),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 착한책가게, 126쪽에서 재인용함.]         

               


4    


우리 사회 다른 한켠에서 ‘청소년 공포(Ephebiphobia)’, 또는 청소년 혐오 담론이 ‘요즘 아이들’ 담론을 지원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Ephebiphobia’를 ‘젊은이(youth)’, ‘청소년(adolescent)’을 뜻하는 그리스어 ‘éphēbos’와, ‘공포(fear)’, ‘공포심(phobia)’을 뜻하는 ‘phóbos’가 결합된 말로 풀이한다. 커크 애스트로스(Kirk Astroth) 미국 애리조나 대학교 교수가 1994년에 <청소년 혐오를 넘어서(Beyond ephebiphobia)>를 쓰면서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한다.


모든 담론이 그렇듯이 청소년 공포론 역시 정치・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다.[아래 ‘청소년 혐오’ 관련 내용은 쥬리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가 <미디어스>에 쓴 ‘우리 사회의 청소년 혐오’(2016년 7월 2일) 기사 참조] ‘성인중심주의(Adultism)’에 저항하는 단체로 알려진 미국의 ‘The Freechild Project’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 공포는 미디어와 정치, 학교 현장 등에 만연한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전사회적 공포를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하여 거대 미디어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강화된다. 민주주의, 사회문화, 교육, 경제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 측면에서 청소년은 참정권을 부정당하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된다. 정치인이나 정치 조직은 청소년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청소년을 악마화(demonize)하는 현상, 가족 안에서 부모가 청소년 자녀와 자녀의 친구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청소년 공포 담론의 시원은 역사가 깊고 영향의 자장권이 아주 넓다. 우리가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상식’처럼 알고 있는 교육 시스템의 역사적인 맥락과 의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대다수 국가에서 청소년 교육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의무교육 시스템이나 주요 훈육 방식 중 하나인 체벌, 학교에서의 나이(학년) 구분 방식 들이 청소년 공포론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한다.    


19~20세기 많은 청소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자,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 사회와 어른들이 학교를 의무화하여 청소년이 낮 시간동안 거리에 모여 있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가 나이(학년)구분이라고도 설명한다. 경제 측면에서는 청소년이 의미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구조, 가게들이 ‘보호자 동행 없이 18세 미만 출입 금지’ 간판을 내거는 현상, 청소년이 거리에 많이 보이는 동네를 어른들이 피하는 바람에 상권이 변화하는 현상도 ephebiphobia의 결과라고 말한다. - 쥬리, ‘우리 사회의 청소년 혐오’, <미디어스> 2016년 7월 2일 기사.  

  

5   

 

지배문화가 ‘정상’ 행동을 규정한다. 북미 교육학자 오즐렘 센소이와 로빈 디앤젤로가 최근작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에 펼쳐놓은 주장 중 하나다. 아이들을 뒷담화하는 어른들(교사, 학부모)의 의식 이면에는 아이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지배집단으로서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갖게 되는 ‘특권 의식’이 작동한다.


센소이와 디앤젤로의 논지에 따르면 그들은 아이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임의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아이들의 경험을 쉽사리 무시하고, 그들의 경험이 갖는 의미를 함께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사회・문화 등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청소년 문제를 제대로 볼 생각이 없다. 그것들을 고칠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문제들은, 김성윤이 ‘블랙박스’에 빗댄 ‘요즘 애들’을 통해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해결하려 한다.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 ‘방치’나 ‘무시’에 불과한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라는 점을 알면서도 말이다.    


6    


이른바 ‘사춘기’를 행복하게 보낸 아이들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사춘기에 받은 정서적인 상처는 일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되어 아이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만큼 사춘기가 중요하다.


‘요즘 아이들’과 ‘청소년 공포’의 주된 표적인 ‘중딩’과 ‘고딩’들을 좀 풀어 주자. 되도록 믿어 주자. 시간을 충분히 주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자. 더 많이, 더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깊고 진실하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자.


그 사이 아이를 향한 지나친 기대나 일방적인 훈계나 ‘뒷담화’나 편견은 멀리 차 버리자. 솔직히 아이들의 언행이 밉거나 무서워 ‘괴물’ 같아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미성숙해 사리분별을 못한다는 ‘아이’보다 못한, 진짜 ‘괴물’ 같은 성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만의 완고한 세계에 빠져 사는 ‘어른애’, ‘개・돼지론’을 믿으며 삿된 욕심과 욕망에 허우적거린 채 사는 정말 ‘모자란’ 어른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한 번쯤 돌아보자. 우리 모두 10대 시절을 힘겹게 거쳐 왔다. 그 시절을 살았다! 아이들은 ‘아직’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충분하고 깊이 경험하지 못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엄마·아빠나 선생님을 ‘이해하라’는 말은 어쩌면 아이들에게 알아듣기 힘든 ‘외계어’일지 모른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훨씬 더 유연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말뜻 그대로의 ‘어른’에 합당한 자세이자 태도가 아닐까. 그럴 때 비로소 아이들은 물론 우리 어른들 자신을 옥죄는 제도와 시스템의 음흉한 미소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김성윤의 책 <18 세상: 엄숙한 꼰대 열받은 10대 꼬일 대로 꼬인 역설의 시대> 표지다.

작가의 이전글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