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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13. 2016

부모가 공동체에 참여하면 아이들이 성공한다고?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의의와 영향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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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개인들 사이의 연계,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말이다.[아래 ‘사회적 자본’과 관련된 연구사, 주요 내용 등은 로버트 푸트넘(2009), <나홀로 볼링(Bowling Alone> 페이퍼로드. 참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6년 미국 사회학자 리다 하니판(Lyda Hanifan)이 최초로 고안했다.


실용적 개혁자이기도 한 하니판은 콧대 높은 사업가와 경제학자들에게 사회적 자산의 생산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본’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개인들 간 ‘호의’나 ‘동료애’가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오고, ‘동정심’과 ‘사회적 교섭’ 같은 것들이 생산 활동에 기여하는 ‘자본(capital)’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정치학자이자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정책대학원 교수인 푸트넘은 사회적 자본이 ‘개인적 이익(private good)’인 동시에 ‘공적인 이익(public good)’이라고 규정했다.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자본이 행위의 상호 의무와 책임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회적 네트워크와 호혜성의 규범이 서로 이득을 얻기 위한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적‧정치적 거래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지면 기회주의적 처신과 부정행위를 할 동기가 줄어든다. 모조품이 난무할 가능성이 극단적으로 큰 다이아몬드 거래가 인종적으로 동질적 폐쇄 집단 사이에 집중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회적 유대가 촘촘하면 그 안에서 소문도 무성하게 생기지만, 좋은 평판을 갈고 닦을 여러 귀중한 방법들도 수월하게 마련된다. 바로 이것이 복잡한 대규모 사회에서도 신뢰가 구축될 수 있는 핵심적 토대에 해당한다. - 로버트 푸트넘(2009), <나홀로 볼링>, 페이퍼로드, 22쪽.

   

푸트넘이 주목한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자본은 정치 참여, 단체 활동, 종교적 참여, 직장에서의 연계,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연계, 이타심‧자원봉사‧자선심, 호혜성‧정직‧신뢰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노동조합(노조)의 예를 들어보자. 노조와 같은 직업인 단체에 대한 시각은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관점으로 대별된다. 푸트넘은 이를 경제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노조나 전문직 단체들은 ‘독점 카르텔’, ‘현대판 길드’로 규정된다. 구성 주체들이 ‘작당’해 경쟁자를 누르고 수입을 올리려는 이익단체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 사회학적 측면에서는 사회적 연대성을 만들어내는 장소다. 이때 노조는 상부상조와 전문 기술 공유의 메커니즘으로 평가받는다.     


근본적으로 이 두 개의 이미지는 상호 보완적이다. 조합원들 사이의 경제적 협력에는 연대성이 핵심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교사조합 혹은 변호사협회가 챙긴 경제적 실리를 한탄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이 대표하는 사회적 자본은 인정할 것이다. - 로버트 푸트넘(2009), <나홀로 볼링>, 페이퍼로드, 127쪽.

  

푸트넘은 사회적 자본의 외부 효과가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보았다. 반사회적인 도시 갱단이나 지역이기주의에 기반한 님비 운동을 보자. 넓게 보면 이들도 자신들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을 이용한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자본이 전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푸트넘의 생각이었다. 근거가 있었다. 아이들의 삶과 교육 분야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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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트넘에 따르면 아이들의 발전은 사회적 자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는 신뢰, 네트워크, 아이들의 가족‧학교‧또래집단‧공동체 내에서 호혜성의 규범이 아이에게 주어질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선택, 그리고 어린이의 행동과 발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사회적 자본은 착한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준다.


사회적 자본 지수와 어린이 행복 지수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한 푸트넘의 분석을 보자. 사회적 자본 지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지역, 곧 그 지역의 주민이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단체에 가입하며, 자원봉사와 투표에 참여하고, 친구들과 사교 활동을 많이 하는 주에서는 어린이가 잘 자란다고 한다.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난다. 10대가 학교를 중퇴하거나 임신해서 부모가 되고, 폭력 범죄에 휘말리거나 자살‧살인으로 일찍 죽는 일이 적다.   

 

우리의 분석은 사회경제적 특징, 그리고 인구학적 특징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자본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실제로 다양한 어린이 행복 지수 전체에 걸쳐 사회적 자본은 어린이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폭과 깊이에서 빈곤 다음이었으며, 그 외의 다른 요소들보다 영향력이 컸다. 빈곤은 어린이의 출생률, 사망률, 질병, 학교도 다니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데 특히 강한 영향을 미치는 반면, 지역 공동체 참여는 정확히 반대 결과를 불러온다. - 로버트 푸트넘(2009), 위의 책, 491쪽.    


사회적 자본은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나 학교 생활에 영향을 준다. 사회적 자본은 학생 성적과 비례하고, 학업 중퇴 비율과 반비례한다. 1990~1996년 사이 미국 48개 주 인종 구성, 경제적 풍요와 불평등, 성인 교육 수준, 빈곤율, 교육비 지출액, 교사 월급, 학교 크기, 가족 구조, 종교, 사립학교 부문 크기 등 주 교육정책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도 사회적 자본의 유익한 영향이 유효했다. SAT(미국 대학 입학 시험) 점수의 경우, 인종과 빈곤과 성인 교육 수준의 영향은 간접적일 뿐이었다.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예측할 수 있는 보다 강한 지표는 주의 ‘공식적’인 제도화된 사회적 자본의 수준보다 ‘일상적’인 사회적 자본의 수준이라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민이 클럽 모임, 교회 참석, 공동체 프로젝트 동참에 할애하는 시간의 양보다는 그 주의 사회적 신뢰의 수준, 그리고 사람들이 (카드게임, 친구 방문 등등에서) 서로 일상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횟수가 학교 성적과 훨씬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략) 사람들이 서로 유대 관계를 맺는 공동체에는 어린이의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 투박한 증거는 말하고 있다. - 로버트 푸트넘(2009), 위의 책, 495쪽.  

  

사회적 자본의 영향은 지역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교 내의 사회적 자본이 학생, 교사 운영자에게 커다란 혜택을 준다고 한다. 가령 작은 학교가 큰 학교보다 우수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밝힌 연구들이 최소한 30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작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과외 활동에서 서로 직접 얼굴을 맞대며 참여하고, 학교 클럽 등에서 책임을 맡을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고 장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적 자본의 밀도가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성적에 눈에 띄는 효과를 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푸트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공동체 업무에서 시민적 참여가 높은 곳에서는 학부모의 후원 수준이 높다. 반면 학생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수준이 낮다는 게 일반적이다. 사회적 자본이 높은 주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높은 것은 적은 티브이 시청 시간과 관련된다. 아이들의 하루 평균 티브이 시청 시간, 성인의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연계성 사이에 아주 강한 반비례관계가 나타난다고 한다.    


주와 주의 비교 분석은 공동체 참여가 학생들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결과를 보여준 수십 년 동안의 연구들을 다시 확인해준다. 이 연구들은 학생의 학업이 학교와 가정의 환경뿐 아니라 학교 안의, 그리고 보다 넓은 공동체 안에서의 사회적 네트워크, 규범, 신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해왔다. - 로버트 푸트넘(2009), 위의 책, 498쪽.    


사회적 자본의 영향력은 커졌을까. 푸트넘은 맞벌이 가족에서 알 수 있는 시간과 돈의 압박(10퍼센트), 교외 지역의 도시화와 장거리 출퇴근과 도시 팽창(10퍼센트), 여가를 혼자 소비하게 하는 전자화한 오락 수단과 텔레비전의 영향(25퍼센트), 세대교체(50퍼센트) 등으로 인해 시민적 참여와 사회적 자본이 지속적으로 쇠퇴해 왔다고 보았다.     


3    


노예제에 대한 푸트넘의 독특한 개념 정의를 보자. 그는 노예제를, 노예들 사이에 그리고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사회적 자본을 무너뜨리려고 고안된 사회 시스템이라고 규정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호혜성의 네트워크가 잘 확립되어 있으면 반역의 위협이 커지며,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평등주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면 노예제 시스템의 정당성 그 자체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사회적 자본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과 노예제에 관한 푸트넘의 논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오늘날 대다수 학교는 학교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자치 문화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학생회‧학부모회‧교사회 등 교육주체들이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이 쉽지 않다. 학교문화는 ‘제왕’ 교장이 다스리는 ‘전체주의’ 시스템에 다라 굴러간다.


정부는 교사들의 결사체인 노동조합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령 시시콜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받아오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출범 27년, 합법화 17년만에 법외노조로 내몰린 것은 결코 단순한 법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대체로 정부 지시에 잘 따르는 여타 교원단체들이 정부의 칼끝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를 떠올려봐야 한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학교와 정부는 교사와 아이들이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푸트넘을 따라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교사와 아이들이 노예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나와 있다. 사람을 만나고 세상으로 들어가라. 우리 스스로 자유인이 되고, 자녀를 행복하게 하며, 그들을 학교에서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 강력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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