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와 유사인종주의(pseudoracism)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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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미들맨(middleman, 중개상)’ 지식인 같은 한국 교수들과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종속된 한국학계의 현실을 꼬집었다. 그는 <교수신문>과 한 인터뷰(2015년 6월 15일자 기사,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배타적 인종차별주의 극복해야 학계 산다”)에서 “미국 유학파는 유학파들끼리, 서울대 출신은 서울대 출신끼리, 연·고대 출신은 연·고대 출신끼리, 자대 출신은 자대 출신끼리 해 먹”는 대학 교수들의 행태를 ‘배타적 인종차별주의’에 빗대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 교수는 ‘배타적 인종차별주의’의 근거로 한국 교수사회의 ‘동종교배’(자교 출신 교수) 비율을 들었다. 미국 연구 중심 대학의 동종교배 비율은 10~20퍼센트라고 한다. 반면 한국 대학의 동종교배 비율은 서울대 88퍼센트, 연세대 76퍼센트, 고려대 6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김 교수는 “한국 교수 집단이 미치지 않고는 이런 통계가 나올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이다. 또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라고 말했다.
학벌주의를 배타적 인종차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김 교수의 시선은, ‘여성 혐오’, ‘전라도 혐오’, ‘진보 혐오’ 등 ‘혐오 담론’으로 특징지워지는 일베 담론의 특징을 ‘타락한 능력주의’에서 찾는 칼럼니스트 박권일의 시각(박권일 칼럼니스트, “당신은 ‘일베 코드’에서 자유로운가”, <한겨레 21>, 제1058호, 2015년 4월 22일자)과 상통한다.
박권일은 “‘능력만큼 우대받아야 하고 능력이 있는 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능력주의(Meritocracy)’로 규정하면서, 타락한 능력주의는 “능력자는 존중받는 게 당연하지만 능력(Merit)이나 자격(Membership)이 없으면 얼마든지 차별하고 모욕해도 되는 능력주의”로 정의한다. 그는 타락한 능력주의가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의 토대가 허물어진 능력주의이고, 그래서 사실상 인종주의와 구별 불가능해진 능력주의라고 보았다. 학벌과 서열에 유독 민감하고 틈만 나면 ‘스펙 인증’을 하는 일베 유저들의 모습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보았다.
‘김치녀’에 대한 일베의 혐오는 무임승차에 대한 증오를 젊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투사한 것이다. 진보세력에 대한 증오는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이 능력에 비해 과도한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했다.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이나 그와 비슷한 사회적 배려 정책에 대해서도 일베는 항상 격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들이 기여한 바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박권일, 위의 글, 2015.4.22.
박권일은 한국의 주류가 자기 자식이랑 놀고 있는 아이네 집이 임대아파트인지 고급 아파트인지, 아버지의 직장은 어디이고 직급은 무엇인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라고 꼬집으면서, 이들이 일베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일베 코드를 선취하고 있었다고 단언했다. 배타적 인종차별주의 같은 학벌주의에 빠져 있고,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며, 타락한 능력주의에 매몰된 이들이 한국 교수 집단과 일베 유저들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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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울대 학내 커뮤니티에 ‘지균충(지역균형+벌레)’, ‘기균충(기회균등+벌레)’ 같은 말들이 잇따라 올라왔다고 한다. 농어촌 지역 고교나 저소득가구 등 열악한 환경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학생들을 배려하는 지역‧기회균형전형 입학생을 수능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서울대 학생 계급 피라미드의 ‘하층 계급’으로 분류해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겠다. 성적에 따른 구별이 인간 차별로 연결되는 인종주의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생들의 사례는 서울대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지난 8월 9일 김경근 고려대 교수가 한국교육사회학회에 제출한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흙수저 배려할 이유 있나” 청소년들, 위험한 능력주의 맹신’, <한국일보>, 2016년 8월 10일자 기사 참조)을 보면 성적에 따른 능력 차별이 정당하다는 시각이 우리나라 학생들 사이에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전국 16개 시‧도 중‧고교생 1212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이번 연구 결과 ‘능력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을 다르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능력주의 태도)는 항목이 평균 2.917점(4점 만점)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합격자를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적’(2.623점),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 고려’(2.436점) 등 나머지 항목도 중간 값(2점) 이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는 가구소득, 주관적 계층인식, 학업성취도, 부모 교육 수준 등 환경 요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계층인식과 학업성취도 등이 낮을수록 능력주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기존 가설을 벗어난 결과라는 것. 김 교수는 “‘금수저’든 ‘흙수저’든 능력에 따라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능력이나 업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합격자를 선발할 때 성적을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 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있을까. 확실한 답을 내놓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과 성과 사이의 연관성이 임의의 우연적인 요소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2013, 개마고원)에 인용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강연 한 토막을 다시 가져와 보자.
“능력 위주 사회에서는 기회가 공정하다고 해도 타고난 재능 덕에 자격 없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거나 보상을 받습니다. 노력도 노동윤리도 수많은 가정환경에 좌우됩니다. 가정환경은 우리 노력과 상관없습니다. (중략) 심리학자들은 형제간 출생순서에 따라 노동윤리와 노력이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학생 중 첫째 손들어 보세요!” 그리고 대다수가 손을 들었고 논쟁은 종료된다. - 오찬호(2013), 위의 책, 210~211쪽.
무엇보다 가족의 경제적인 부와 부모 학력과 같은 문화적인 환경이 학생들의 학업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있다.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인 강남구 소재 고교의 서울대 입학생 수는 2010년 145명에서 2011년 160명을 거쳐 2012년에 224명으로 급증했다. 서초구 역시 2010년 77명과 2011년 75명을 지난 뒤 2012년에 102명으로 대폭 상승했다. 반면 서울의 대표적인 ‘개천’인 금천구는 2012년에 서울대에 12명을 입학시켰다. 성동구, 강북구, 서대문구, 영등포구는 8명, 중랑구는 6명이었다.
학교 유형에 따른 ‘부촌’과 ‘개천’의 격차도 크다. 2014년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전국 4년제 일반대학 174개교의 공시 항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4학년도 서울대 입학생 3369명 가운데 일반고 출신은 1572명으로 46.7퍼센트에 그쳤다. 일반고 출신 서울대 입학생 비중이 절반 아래로 내려간 것은 서울대 역사상 최초였다.
서울대 입학생의 나머지는 특목고(801명, 23.8퍼센트), 자율고(683명, 20.3퍼센트) 등 ‘부촌’ 학교 출신들이 차지했다. 우리나라 전체 고교생 가운데 일반고 학생 비중은 71.6퍼센트, 특목고와 자율고는 각각 3.5퍼센트, 7.9퍼센트 정도다. 서울대 입학에 관한 한 ‘일반고의 몰락’이라는 평가가 틀리지 않아 보인다.
서울대 입학생들은 부모의 학력과 직업, 출신 지역에서 ‘개천’ 출신 ‘흙수저’들과 차이가 난다. 2013년 서울대의 ‘신입생 특성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신입생 중 아버지와 어머니 학력이 대졸 이상인 경우는 각각 83.1퍼센트와 72퍼센트에 달했다. 2010년 인구총조사에서 집계된 20세 이상 성인 중 대졸자 비율인 43.2퍼센트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부모 직업이나 학생들의 출신 지역 현황도 ‘개천에서 용 나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버지가 사무종사자나 전문가와 같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계층에 종사하는 입학생 비율이 절반을 넘는 53.5퍼센트나 됐다. 서울대 입학생 중에는 도시 지역 학생도 많았다. 서울 출신이 34.9퍼센트였다. 광역시와 수도권을 포함한 대도시 출신을 모두 합한 비율은 74.3퍼센트에 달했다. 10명 중 거의 3명꼴이었다.
사교육비와 같인 학교교육 외에 들어가는 교육비용의 차이도 무시하면 안 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월평균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의 사교육비는 42만 원, 100만원 미만 가구의 사교육비는 6만6000원이었다. 7배의 차이가 난다. 사교육 불평등은 그대로 입시 불평등이나 취업 불평등으로 이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능력과 노력보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성공이 좌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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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주의, 타락한 능력주의, 지균충과 기균충 등에 담긴 정치사회적 의미를 인종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까. 교육학자 오즐렘 센소이와 로빈 디앤젤로는 최근작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2016, 착한책가게)에서 인종주의를 “한 인종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억압의 한 형태”로 정의했다. 그것은 지배집단 인종의 (소수화집단 인종에 대한) 인종적‧문화적 편견과 차별, 또는 사회적‧제도적으로 지배집단(가령 흑인을 지배하는 백인 집단)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는 체제다.
일정한 학벌 범주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부족하므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학벌주의) 무능력한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타락한 능력주의) 성적이 낮은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다.(지균충과 기균충) 센소이와 디앤젤로가 규정한 인종주의의 특성에 대체로 부합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학벌주의나 타락한 능력주의 등 학벌과 학력과 성적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런 일련의 태도를 ‘유사인종주의(pseudoracism)’로 명명하고자 한다.
유사인종주의자들은 ‘특권의식’에 빠져 있다. 센소이와 디앤젤로를 따라 특권이 내적 태도에 미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살펴보자.
첫째,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 위치에 있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취를 노력과 능력과 장점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는 능력주의, 사람들이 편견을 갖지 않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회를 갖는다는 동등한 기회의 이데올로기, 지배집단과 소수화집단 사이의 측정 가능한 격차(교육, 건강, 소득, 순자산 등)를 각 개인의 장점과 단점에 따른 것으로 보는 개인주의, “누군가는 위에 있어야 하지”라는 식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의식을 뒷받침한다.
둘째, 우월감의 내면화. 지배집단은 사회의 ‘정상’을 정한 뒤, 스스로를 우월하게 묘사하고 우월성을 확인하고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소수화집단의 관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가령 ‘성적’이 좋은 것이 ‘정상’이므로, 낮은 성적을 가진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그 상태를 ‘정상인’의 도움을 통해 벗어날 수 있다. 그들이 왜 성적이 낮은지 ‘진짜’ 이유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려고 하더라도 능력주의, 개인주의, 동등한 기회의 이데올로기라는 분석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셋째, 특권 집단은 제한적 시각 때문에 겸허함이 부족하다. 그들은 특권 행사로 인한 오만한 때문에 소수화집단의 말을 들어보았건 아니건 이들을 대변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면화된 지배가 기본 모드로 되어 있어서, 즉 소수화집단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내면화되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상호작용한다는 것.
넷째, 지배집단은 특권을 보지 못한다. “허가받은 무지”, “의도적 무지”와 같은 말들이 있다. 지배집단 구성원들이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무수한 증거들을 모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학을 가리키는 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저항한다.(센소이와 디앤젤로의 책 142쪽에서 가져옴.]
불평등을 ‘입증’하기 위해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고 한다.(“이 통계가 언제 발표되었나요? 지난 10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도 하지 않았으면서 억압을 경험하는 사람이나 이 분야 전문가들과 논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반례나 예외를 든다.(“하지만 루스벨트는 장애가 있는데도 대통령이 되었지 않나요?”)
물길(화제-필자)을 돌린다.(“진정한 억압은 계급입니다. 계급 불평등을 없애면 다른 억압들을 사라질 것입니다.”)
위협(“협력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방어적 태도(“내가 장애인 차별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숙모도 장애인이에요!”)
연구결과를 부인하고 개인적‧일화적 예를 들어 불평등이 별것 아닌 듯이 취급해버린다.(“우리 반에 휠체어 탄 아이가 있었어요. 다들 그 아이를 좋아하고 아무도 휠체어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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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위치와 특권적 위치를 동시에 차지할 수 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교차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여러 사회적 정체성들이 상황에 따라 더 두드러지기도 하고 덜 드러나기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신화’로 보이는 까닭은, 이른바 ‘능력’이 그 사람의 진정한 ‘실력’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능력은 임의의 우연적인 요소, 가령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때가 많다.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에서 보여준 수많은 사례들을 참고할 만하다.[아래 7월 31일자 글 “‘실력자’의 ‘실력’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https://brunch.co.kr/@jek1015/44) 참조] 능력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실력주의로 전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김종영 경희대학교 교수의 책 <지배받는 지배자> 표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