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생성 조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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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동물학과의 조류 사육장에 아주 흥미로운 동물들이 살고 있다. 고향이 태평양 남서쪽의 뉴칼레도니아 섬인 뉴칼레도니아 까마귀가 주인공이다. 긴 수명 기간 동안 군집(群集) 생활을 하는 특징이 있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놀라운 특징이 있다. 이들은 부리가 닿지 않는 고정된 시험관 안의 고깃조각을 빼내 먹을 수 있다.
우리가 준비해 줘야 할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날아와 쉽게 앉을 수 있는 탁자와 그 위에 놓을 꼬치구이용 막대기만 있으면 된다. 녀석들은 이 막대기를 이용해 시험관 안에 놓인 고깃조각을 콕콕 찔러 잡아 뺀 다음 맛있게 먹는다고 한다.
‘베티(Betty)’는 옥스퍼드대 동물학과 조류 사육장에서 살아가는 까마귀 무리 중 특별한 눈길을 끄는 녀석이다. 나이가 가장 많으면서도 막대기 활용 능력이 조류 사육장 내에서 독보적이라고 한다. 베티가 보여준 놀라운 능력을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
알렉스 위어(Alex Weir)는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의 박사과정생이었다. 그 해 위어는 비디오로 촬영되는 한 실험에 베티를 출연시켰다. 갈고리 모양을 써야 먹이를 빼낼 수 있는 조건에서 새들(베티의 단짝인 ‘아벨’이라는 새도 출연했다.)이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일자(一字)와 갈고리 모양의 철사 도구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 관찰 포인트였다.
위어는 유리 실린더 안에 손잡이가 달린 장난감 바구니를 담아 놓았다. 안에는 고깃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베티와 아벨이 고기를 먹으려면 실린더 안의 바구니를 갈고리 모양의 도구로 빼내야 했다.
실험 초반, 베티의 짝 아벨이 먼저 날아올랐다. 아벨은 곧장 갈고리 모양의 철사를 입으로 물려고 했으나 실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횃대에서 아벨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티가 날아올랐다. 베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자 모양의 철사를 입으로 물었다. 곧이어 철사를 적당한 틈에 밀어 넣어 갈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 같았다. 베티는 갈고리 모양이 된 철사를 실린더 안으로 밀어넣었다. 철사에 걸려 실린더에서 빠져 나온 고깃덩어리는 베티의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침팬지와 돌고래는 거울을 보고 자신을 알아본다. 아프리카의 고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쓴다. ‘여왕’ 같은 암컷 코끼리는 무리 안의 지식을 학습하고 기억해 후손들에게 전해준다. 까마귀는 자신의 뜻에 맞게 철사를 구부릴 줄 알았다.
이들의 사례는 언어의 생성 조건 중 하나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위에 소개한 똑똑한 동물들은 모두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사고 능력은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토대다. 지난 세기까지 높은 수준의 인지 능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위의 사례들은 동물이 언어 없이도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사고 활동이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고 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2001년 어느 날 우리에게 맥가이버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 까마귀 베티가 단서를 준다. 베티가 횃대에서 날아올라 일자 모양의 철사를 향해 가던 그 몇 초 간을 상상해 보자. 베티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인간의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는 뇌 신호가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일자 형을 구부려 갈고리 모양의 철사를 만들어야지. 이것을 이용하면 바구니 속에 있는 고기를 꺼낼 수 있을 거야.’
좀 더 분석해 보자. ‘일자 형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만든 철사’는 ‘지시 대상’에 해당한다. ‘바구니 속의 고기를 꺼내는 데 쓰이는 도구’는 일종의 ‘개념’이다. 지시 대상과 개념은 말(단어)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고 작용의 결과물에 해당한다. 베티의 뇌 속에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하나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선을 다시 저 먼 과거 조상 인류에게 돌려 보자. 최초로 말을 내뱉기 시작한 미지의 인류 조상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사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의 사례를 두루 살펴보았다. 베티의 사례를 떠올리기 바란다. 사고는 언어 생성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과거의 조상 인류들 또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 ‘사고한다’는 것의 의미를 따져 보자. 생각과 사고 과정을 설명하는 심리학 이론은 아주 많다. 여기서는 ‘추론(reasoning)’, ‘기억(remembering)’, ‘범주화(categorizing)’, ‘표현(representing)’ 등 몇 가지 단계별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을 따라가 보자. 루시 누나와 동생 살렘이 살았던 세상에 관한 상상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날 루시와 살렘은 동굴을 빠져나왔다. 발걸음은 깊은 숲속을 향하고 있었다. 낯설고 사나운 동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긴 건기 동안 너무 많이 굶었다. 먹은 것은 동굴 근처 나무에서 나는 자잘한 열매들뿐이었다. 가끔 커다란 검치(劍齒) 호랑이가 먹다 남긴 들소 뼈를 얻기도 했다. 그걸 깨뜨려 골수(骨髓)를 빼먹기도 했으나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살렘 손을 꼭 잡은 루시의 머릿속은 온통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건기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느새 루시와 살렘은 깊은 숲속 양지 바른 곳에 이르렀다. 눈앞에 기다란 모양의 노란색 열매(‘바나나’라고 하자. 그들에게는 아직 ‘바나나’라는 ‘말’이 없다. 당연히 ‘과일’이라는 ‘개념’도 없다.)가 주렁주런 매달린 가지가 눈에 띄었다. 루시는 가지에서 열매 하나를 따 코에 갖다 댔다.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난생 처음 맡아보는 황홀한 향기였다. 껍질을 벗겨 한 입씩 먹었다. 맛이 좋았다. 동굴로 돌아가는 그들의 품에는 노란 열매가 가득 안겨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숲에서는 더는 노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루시는 살렘을 데리고 숲 반대쪽으로 난 길을 나섰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들은 한 나무 아래에 멈추었다. 주변에 조금 길쭉한 주먹 모양의 나무 열매(‘망고’라고 하자.)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루시는 열매를 집어 들었다. 숲에서 얻은 노란 열매보다 더 강렬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순간 얼마 전 먹었던 기다랗고 노란 열매를 떠올렸다. 루시는 주저하지 않고 열매 껍질을 벗겨 한 입 깨물었다. 노란 열매보다 더 달콤하고 맛깔스러운 과즙이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처음 향기를 맡으면서 머릿속으로 ‘예측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맛있게 열매를 먹고 있는 루시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줄기가 있는 큰 나무의 가지에 열리고, 달거나 신 맛이 있으며, 즙이 많은 열매는 먹기에 좋은 것들이군.’
이렇게 정리해 보자. 루시는 바닷가 가까운 곳에서 망고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 전에 본 바나나를 떠올린다(기억). 이어 잘 익은 망고 열매가 내뿜는 강렬한 향기를 맡으면서 그것이 전에 먹은 바나나와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한다(추론). 마지막으로 망고의 맛을 음미하면서 머릿속에 어떤 ‘생각’, 곧 바나나와 망고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떠올린다(범주화). 시간이 흐르면서 루시와 살렘의 후손은 조상들이 떠올린 개념을 가리키기 위해 ‘과일’이라는 이름을 붙인다(표현).
언어 생성과 관련한 완전한 사고 작용이 이와 같은 네 가지 단계, 곧 기억→추론→범주화→표현의 복합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표현’은 개념을 말로 나타내는 과정, 곧 ‘언어화’다. 그러므로 언어가 생성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사고 작용은 ‘범주화’에서 마무리된다.
중요한 것은 기억, 추론, 범주화도 어떤 ‘생각’과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범주화는 표현 대상의 관념적인 영상을 대뇌 피질 어딘가에 저장해 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추상적인 개념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범주화’ 개념은 ‘말할거리’라고 지칭할 수 있다.
동물도 사람처럼 생각하고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언뜻 보면 무모해 보인다. 이 생각이 옳다면 언젠가는 동물도 인간의 언어를 깨우치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 언어에 버금가는 언어를 갖게 되지 않을까.
동물이 무언가를 생각한다고 보는 관점은 약간의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앞서 소개한 베티나 그밖의 동물 사례들이 구체적인 증거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동물들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사고한다는 점을 두루 뒷받침한다. 인간과 비교할 때 수준 차이가 명백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완벽하게 배울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앵무새 알렉스처럼 인간의 말을 상당히 잘 알아듣고 따라할 수 있는 경우가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동물의 언어 습득에 관한 책을 두루 읽어 본 이라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던 고릴라 ‘코코’의 사례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실상 알렉스와 코코의 사례는 발성을 하지 못했을 뿐 인간의 말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베티의 경우는 어떨까. 베티는 상황에 맞게 도구를 변형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준 높은 사고 작용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고 작용은 언어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펼쳐질 아주 긴 진화 과정을 고려해 보자. 까마득한 미래에 앵무새나 고릴라나 까마귀들이 인간처럼 언어를 구사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적어도 현재의 진화 단계에서는 사람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말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은 아주 자명하고 상식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다.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현재 단계에서 지상의 인간은 바닷속 돌고래가 될 필요가 없다. 돌고래처럼 저주파의 울음 소리로 서로 의사소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숲과 정글에서 사는 앵무새, 까마귀, 고릴라 또한 인간의 말을 배워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앵무새와 까마귀가 날갯짓을 하는 데 인간의 말은 불필요하다. 고릴라는 인간의 말이 없어도 나무를 잘 탄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언어’만 있으면 된다. 인간의 말을 배워야 할 진화론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인간은 인간의 진화 과정을 따르고 돌고래는 돌고래의 진화 과정을 따른다. 그 과정이 고도로 체계적인 진화 ‘설계도’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다. 그 우연한 진화 과정에서 머릿속 ‘생각’을 지금과 같은 말로 바꾸려고 노력한 종은 인간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말은 인간의 전유물이다. 진화 과정에서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친 생물종은 인간밖에 없었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까마귀 베티가 철사를 구부리는 모습이다. <동아사이언스>(University of St Andrews 제공,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13423)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