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3)
1
펜은 마음의 혀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한 말이다. 주지하듯 ‘펜’은 글의 대유다. 세르반테스의 말은 가슴으로 하는 말이 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누군가 쓴 한 편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을 읽는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어떤 인생을 꾸려가고 싶어하는지 본다. 그가 하는 말이 그 자신인 것과 똑같이 그가 쓰는 글이 그 자신이다!
몇 년 전 ‘어깨동무’ 글쓰기를 했다. 일종의 일기 이어쓰기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바로 앞 친구가 쓴 글에서 열쇳말을 골라 그것을 제목 삼아 글 한 편을 써야 했다. 주제, 내용, 형식이 자유였다. 글쓰기가 부담스러우면 만화나 그림을 곁들여도 되었다.
학기 초 각 반 수업 시간에 어깨동무 글쓰기 활동을 소개했다. 예상한 반응들이 나왔다. 왜 써야 하느냐. 안 쓰면 어떻게 되느냐. 쓰는 게 힘들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지만 짜증 나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들도 보였다.
“어깨동무 글쓰기가 힘들고 귀찮다는 건 선생님도 알아. 하지만 이걸로 너희들 고통스럽게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럴 마음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단지 너희들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야. 어깨동무 글을 쓰려면 친구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열쇳말을 골러야 하잖아. 그 과정에서 차분히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당연히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더 깊이 할 수도 있겠지. 글읽기와 글쓰기가 힘든 세상이지 않니. 지금 우리는 넘친다 싶을 정도로 시각 매체에 노출되어 있어.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되는지 떠올려 보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어깨동무 글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밀고 나갔다. 여의치 않았다. 2주를 지나는 시점에서도 처음 분량 조건으로 내세운 공책 한 면을 제대로 채운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아예 글을 쓰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몇 줄로나마 글을 써 내고 있었다. 영준(가명)이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2
영준이는 처음부터 어깨동무 글쓰기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수업 후에 따로 불러냈다. 한두 마디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먼산바라기만 했다. 영준이는 딱 두 마디를 반복했다. “안 쓰면 안 돼요?”. “안 쓰면 어떻게 돼요?” 물음 형식을 빌렸지만 ‘안 쓰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준이 반 어깨동무 글쓰기가 다른 반보다 며칠 뒤처지기 시작했다. 수일째 글쓰기 ‘파업’을 한 영준이 덕분이었다. 아침마다 영준이를 찾아갔다. 한 면을 채우기 힘들면 절반이라도 채우라고 구슬렸다. 열쇳말을 고르기 힘들면 직접 단어를 택해 써도 된다고 했다.
며칠 뒤 마침내 영준이에게서 공책을 건네받았다. 문장 몇 개로 된 짧은 글이 담겨 있었다. “나는 중 2다”로 시작하는,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어깨를 다독이며 ‘글 쓰느라 고생했다’고 말해 주었다. 영준이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영준이가 글을 써 냈다는 사실은 작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준이 담임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영준이가 글을 썼어요?”라고 물으셨다. 그다음 수업 시간이었다. 영준이 반에 들어가 글을 짧게 논평해 주었다. 많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자신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고 말해 주었다. 모두 놀란 눈치였다. 영준이 담임 선생님이 보인 ‘영준이가 글을?’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영준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칭찬을 받는 아이 특유의 겸손함과 흡족함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글쓰기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며칠 전의 영준이와 달랐다. ‘고작 네 줄이냐?’며 타박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
중 2 아이들이 쓴 글이라고 지레 예단하지 말기 바란다. 아이들이 쓴 글에는 그들 나름의 생각과 삶의 속살들이 그려져 있다. 철없어 보이는 겉모습 안에 웅숭깊은 마음이 웅크리고 있다.
현우(가명)는 나만 보면 먼저 손을 건넨다. 악수하기 위해서다. 3월 초 복도에서 내가 우연히 건넨 악수를, 현우는 자신과 나 사이의 독특한 소통법으로 활용한다. 현우는 수업 시간에 그리 썩 잘 집중하는 아이가 아니다.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머리를 파묻고 엎드려 잘 때가 잦다. 무언가 해 보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현우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내린 직관적인 판단의 결과가 그렇다.
현우가 처음 어깨동무 글쓰기 공책에 써 놓은 글은 특이하게 제목에 ‘제곱’이 들어갔다. <1, 2, 3의 제곱>. 다음은 그 일부다.
청소년의 삶은 제곱과 같다
1의 제곱은 아무리 1을 곱하고 곱하여도
수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1에다가 1을 더하고, 2를 더하고
3을 더하면 그의 제곱은 배가 되고 배가 된다
우리 모두는 1로 시작하여 거기에 무엇을
더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우는 ‘공부’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끝맺었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백지에 그려지는 물감과 같다’는 비유가 곁들여진 마무리였다. 다른 반에 들어가 현우 글을 소개했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 뒤 글을 들려 주었다. 아이들 반응이 무척 진지했다. 따로 이끌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박수를 쳤다. 또래 글이 주는 공감의 힘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이 쓴 많은 글이 괴발개발이다. 겉으로나마 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성의 없이 써 놓은 글에서 강한 섬광을 느낄 때가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돈오(頓悟; 깨달음)’의 순간이다. 삶을 향한 아이들의 정성을 깨닫는다. 내면을 뜨겁게 고민하는 의젓함을 본다. 글의 길고 짧음과는 무관하다.
4
성수(가명)는 쉬는 시간에 우리 반에 가장 자주 오는 ‘단골 소님’ 중 하나다. 그렇게 와서 친구들과 투닥거리며 야단스럽게 논다. 성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독후감 형식으로 어깨동무 글을 썼다. 글 말미에 헤세의 명언 세 가지를 적어 왔다. 그중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성수가 적어 온 헤세의 말은 나에게 또 다른 ‘돈오’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다른 반 수업 시간에 성수 글을 소개했다. 헤세의 말을 칠판에 적어 놓고 아이들과 함께 의미를 따져 보았다. 적당한 소란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주고받았다. 가슴이 기분 좋게 차올랐다.
5
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사람은 시기별로 뇌 발달 부위가 다르다고 한다. 3~6세에는 인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발달한다. 이 시기에 사랑을 받지 못하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둔감한 ‘괴물’이 되기 쉽다. 6~12세에는 언어와 과학적 사고에 관여하는 측두엽과 두정엽이 크게 발달한다. 책읽기 등을 통해 언어 감각이나 논리력을 키우는 게 중요한 때다. 중2가 포함되는 12~15세에는 후두엽이 크게 발달한다. 후두엽은 인간의 감성을 담당하는 부위다. 감성은 이성에 대응한다. 오감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느끼는 경험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꽉 짜인 학교 일정 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 쉽지 않다. 이때 글쓰기가 감성을 기르는 좋은 수단이 된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감성 능력이 길러진다.
중2는 이른바 ‘중2병’ 걸린 ‘환자’들이 아니다. 북한 인민군이 무서워한다는 ‘괴물’들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의 변화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한창 그들만의 감성 훈련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른들이, 그들이 괴발새발 쓴 글과 함부로 내뱉은 되바라진 말을 통해 그들의 속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섬세한 촉수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보다 속 좁은 어른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