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
1
작년 4월 초 어느 날 늦은 오후였다. 인근 지역 대학에 다니는 졸업생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간학’ 강의 중 발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잠깐 시간을 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기에 ‘그러마’고 흔쾌히 답해 주었다.
그날 저녁 질문지를 전자우편으로 보내왔다. 미리 훑어보고 답변을 준비해 정리해 두면 실제 인터뷰를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찬찬히 읽어가며 원고를 쓰듯 생각들을 정리했다. ‘요새 아이들의 버릇없은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개념 규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버릇없는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적극적인 자기 표현의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버릇없는 행동론’에는 권력 문제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은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들이 만들어낸다.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다짜고짜 아이를 몰아붙이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말이 아니라 손부터 나가는 교사들이 많다. 교사와 학생은 구조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에 놓인다. 이런 구조 속에서 ‘버릇없는 행동’은 ‘을’ 신세인 학생들이 ‘갑’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펼치는 공세적인 생존술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버릇없는 행동’을 누구 시선에서 보고 해석할 것인가다. 교사가 끝까지 자신의 ‘눈’을 고집한다면 ‘버릇없는 행동론’이 무한히 자가 증폭할 것이다. 그 ‘눈’에 아이들의 것을 덧붙인다면 ‘버릇없는 행동론’이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행복한 인간관계론’으로 바뀌지 않을까.
2
눈 깜짝할 새였다. 영찬(가명)이가 몸을 홱 돌렸다. 내 입에서 말 몇 마디가 나간 직후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가끔 엇나갈 때가 있기는 했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감 어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표정이 안 좋았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10여 분이 훌쩍 지나는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유 있는 편안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만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내게는 그런 ‘상식적인’ 판단과 이에 따른 상식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영찬이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조용히 끝냈어야 했다. 다음부터 늦지 말라며 한 마디 툭 던지고 자리에 가 앉으라고 했다면 상황이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표정’에 대한 독해를 엉뚱하게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영찬이는 나와 반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을 그런 어두운 표정으로 전달하려고 했을 수 있다. 나는 반항과 적대감의 표현으로 읽었다. 선생 특유의 ‘꼰대’ 기질이 발동했다. ‘이런 싸가지가 있나.’ 그때부터 머리에서 일장 연설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영찬이를 따로 불렀다.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던 자리라 당황스러웠다, 교사로서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고 가슴이 아팠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렇게 말했다. 순간 욱한 마음에 그랬다, 죄송하다,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 영찬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밝았다. 전날 영찬이 얼굴에 보이던, 불만과 반항기 가득한 표정은 없었다.
3
‘버릇없는 행동론’의 또 다른 사례로 영수(가명)와 명석(가명)이를 떠올렸다. 그 며칠 전이었다. 수업을 시작했는데 둘이 공책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렸다. 낙서하는 것으로 알고 수업이 끝나면 하자고 말했다. 둘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시선을 처리하는 데 신경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버릇없는 행동론’의 관점에서 보자. 영수와 명석이의 킬킬거림은 ‘버릇없는 행동’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녀석들 때문에 수업 흐름이 몇 번 멈추었다. 그림 그리는 걸 막지 못해 결국 5분 간 내 얼굴 그림을 그려 달라는 식으로 ‘딴짓’을 하면서 수업이 중단되었다. 교사로서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으니 나 또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만 할까. 녀석들이 웃은 것은 공책에 서로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 때문이었다. 수업을 멈추고 다가가 공책을 보았다. 조악하고 장난기 가득한 그림들이었으나 제법 그럴 듯하게 서로의 특징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이날 토론 활동을 하기 위해 모둠 수업을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말하자면 얼굴 그림 그리기로 자신들만의 ‘모둠 활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왕이면 내 얼굴도 그려 주라고 했다. 녀석들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1, 2분만에 뚝딱 그림이 그려졌다. 그림 속 얼굴이 엉뚱한 사람 같아 보이다가도 언뜻 내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녀석들 머리에 이미 나의 ‘특징’이 저장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킬킬거리며 그림을 그린 게 버릇없는 행동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행복한 인간관계론’의 연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수와 명석이는 쪽지 한쪽에 “사랑하는 정은균 선생님에게”, “사랑을 담아서”, “사랑해요”를 적어 넣었다. 껄렁대고 잠을 자기 일쑤인 남학생들이다. 무뚝뚝하다. 마뜩찮은 물음에 “왜요?”라며 눈을 부라릴 때 보면 기세등등한 기운이 온몸에 넘쳐난다. 그래서였을까. 그림 쪽지에 적힌 그 ‘사랑’이라는 말에서 내내 눈길을 떼지 못했다. ‘버릇없는 행동론’이 작동했더라도 똑같았을까. ‘사랑’이라는 말 대신 ‘은균 샘 미워’와 같은 말이 자리잡지 않았을까.
4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 날 교실 한켠이 웅성웅성했다. ‘멋지다’, ‘대단해’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평소 껄렁대는 친구 몇이 갑식(가명)이를 둘러싸며 내뱉은 말들이었다.
갑식이는 평범한 친구였다. 오늘날 식의 ‘일진’ 같은 아이들과 어울리기는 했으나 막나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갑식이에게 다가가 보았다. 그의 손목에 생긴 ‘칼빵’ 때문이었다. 커터칼로 새겼음직한 한 여자아이의 이름 세 글자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겁이 덜컥 났다. 칼질 할 때의 그 극심한 고통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이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갑식이는 으스대듯이 우리를 휘휘 둘러보았다. 득의만만한 녀석의 얼굴엔 ‘짜식들, 멋져 보이지? 부럽지?’ 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부터 갑식이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뒤로도 갑식이는 칼이며 자전거 체인 따위를 가지고 와 장난으로 휘두르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갑식이가 ‘칼빵’을 하고 칼이나 자전거 체인을 휘두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른바 ‘가오’를 위한 것이다. 아이들 말로 ‘허세 쩌는’ 행동의 하나. 이진아 브랜드유리더십센터 소장은 <중2병, 엄마는 불안하고 아이는 억울하다>에서 허세가 이른바 ‘중2병’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10대 아이들이 술과 담배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부모와 교사 앞에서 반항하며, 메이커 신발과 의류에 몰입하는 문제가 비슷한 맥락이다. 욕 하기 역시 10대 아이들이 하는 허세 행동의 대표적인 예다. 청소년 상담 전문가 이창욱은 <사춘기 쇼크>에서 욕이 청소년들에게 권력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문신이 심리적 우월감을 주는 것과 비슷한 심리 기제라고 한다.
5
‘진격하는’ 10대들의 언행을 자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행어처럼 쓰는 것이 중2병이다. 이진아 소장은 이를 한철 유행하는 감기 같은 것으로 규정했다. 이를 심각한 ‘질병’ 같은 것으로 만드는 데는 부모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부모 중심이었던 권력 관계가 점차 균형점을 찾아 이동하는 것을 (부모들은-기자) 원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늘 이기고 싶어한다. 어느덧 부모 자녀 관계가 기싸움판이 된 것이다. 아직까지 힘과 경제력, 그리고 심리적인 부분까지 우세한 부모들은 자기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아로 보기 시작한다. - 이진아(2013), 위의 책, 39쪽.
10대 자녀를 둔 많은 부모가 아이들과 기싸움을 한다. 싸움에서 밀린 부모가 더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아이들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 소장은 ‘중2부모병’이라는 말을 썼다. 기득권자인 부모가 아이들이 변화하는 ‘터닝 포인트’에 맞춰 새로운 관계를 세워야 함에도 기존 관계를 유지하거나 더 강화하려고 하면서 아이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점을 꼬집기 위해서였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도 교육 시스템은 보수주의의 성채를 자처한다. 학교교육 시스템의 전근대성, 보수적 가치를 대변하는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는 교사들의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니 ‘중2 교사병’이라는 말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버릇없는 행동론’에 빠진 교사들에게 10대들의 ‘허세 쩌는’ 진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영수와 명석이가 그린 내 얼굴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