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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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경남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십계다. 주체적이고 강한 소명 의식이 없다면 그대로 실천하기 힘든 계율들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발상과 크게 다르다.
대다수 학부모와 아이들은 월급이 많은 쪽을 택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을 바란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안정적인 곳,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으로 몰려든다.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는 ‘공시족’, 해마다 수십만 명 이상이 응시하는 ‘삼성고시’(삼성직무적성검사)가 그 사례다.
아이들에게 장래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묻곤 한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대답이 많이 나온다. 대기업에 취업하고,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화해 불가능한 대립쌍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옛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에게 ‘꿈’을 물으면 대통령이니 유엔 사무총장이니 하는 원대한(?) 목표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오늘날 초등생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장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말하는 ‘공무원’은 그냥 공무원이 아니다. 해고 걱정 없이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는 길이 너무 힘든 세상이다. 공무원은 그런 세상 현실에서 아주 조금 비껴나 있는 직업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이 되고 싶어하는 공무원은, 과거 그들의 인생 선배들이 꿈꾸었던 대통령이나 유엔 사무총장에 버금가는 자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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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3 시절, 장래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알지 못했다. 비전이나 꿈은커녕 어느 고등학교에 가야 할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국어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 직업군인도 나쁘지 않겠다 여겼다. 그렇게 안갯속을 헤매면서도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성적에 맞춰 한 고교에 원서를 냈다. 합격한 뒤 내 맘대로 공부했다. 부모님은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다. 점심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보냈다. 늙은 사서 선생님이 말벗이 되어줄 때가 많았다. 책 읽고 글 끄적이는 사이사이 교과 공부를 했다.
수업은 지겨웠다. 선생님들은 침묵하거나 조는 우리들 앞에서 한 시간 내내 말과 침을 동시에 뱉어낸 후 교실을 빠져나갔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 생활이 나름 즐거웠다. 나만의 방식과 취향대로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거의 모든 것이 불투명한 현실이 불안할 때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0대 후반의 인생 풋내기가 불안해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고 3을 맞았다. 불안 속에서 입시를 맞았다. 막연한 ‘느낌적 느낌’으로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했다. 2지망과 3지망으로 역사학과와 철학과를 썼다. 그 전에 직업군인이 되겠다고 어느 ‘특별한’ 학교에 원서를 냈다가 떨어졌다. 생각해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국어국문학이나 역사학이나 철학과 달리 ‘느낌적 느낌’이 강하지 않았다.
진로와 진학에 관한 의식과 경험은 거의 항상 유동적이거나 불명료했으며 불안정했다. 어떤 꿈을 꾸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등의 선택은 내가 했다. 결과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나 자신이 졌다. 꿈 꾸는 자유, 꿈 꾸지 않을 자유 모두 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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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다수 학교와 교사는 아이들에게 진로와 꿈을 강조한다. 진로와 꿈이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진로와 꿈에 대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졸지에 개념 없이 살아가는 ‘문제아’ 같은 시선을 받는다. 그런 아이들의 진로 문제가 해결되면 학생 교육과 장래 설계의 방해 요소들이 모두 해소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존재한다.
자유학기제와 진로교육집중학기제는 정확히 그런 지점들을 파고들었다. 자유학기제는 중학교 1~2학년 4학기 중 한 학기를 선택해 진로・주제선택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제도다. 진로교육집중학기제는 고등학교 일반계고 1학년을 대상으로 ‘진로와직업’ 교과 및 진로활동을 집중 편성하거나 일반교과와 연계해 진로 수업을 하는 형태로 나뉘어 운영되는 제도다. 둘 다 진로 탐색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이들 정책의 도입 취지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중・고교 현장에 진로 탐색에 초점을 맞춘 두 제도가 공식적으로 착근하기 시작함으로써 ‘진로나 직업에 관한 교육’이 절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몇 마디 해야겠다.
가령 나는 진로교육집중학기제가 ‘일반계고’에 집중된 배경이나 이유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예전 실업계고등학교인 특성화고등학교에서는 이미 완벽한 직업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직업교육은, 마이클 애플이 <민주학교>에서 20세기 초 미국 직업교육에 대해 지적한 말을 그대로 빌려와 표현하면 “주류와 분리되어서, 이등시민을 길러내는 제도”가 된다.
일반계고 역시 그렇게 굴러갈 공산이 크다. 현재 우리나라 고교는 1군 자사고(민족사관고, 상산고 등)와 특목고(과학고, 영재고, 수도권 최상위 외고), 2군 수도권 외고 및 비평준화 자율고(동산고 등), 3군 비수도권 비평준화 자율고 및 명문고와 평준화 자율고와 지방 외고, 4군 일반계고와 일부 특화된 특성화고, 5군, 특성화고와 일부 일반계고 순의 위계 서열이 고착화한 시스템이다. 일반계고와 특성화고가 묶여야 비주류 이등시민인 미래 노동자 직군을 충당할 수 있다.
이미 현실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2014학년도 서울대 입학생 3369명 중 일반고 출신은 1572명으로 46.7퍼센트였다. 일반고 출신 비중이 절반 아래로 내려간 것은 서울대 역사상 최초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특목고(801명, 23.8퍼센트), 자율고(683명, 20.3퍼센트) 출신 학생들이 차지했다. 전체 고교생 가운데 일반고 학생 비중은 71.6퍼센트, 특목고와 자율고는 각각 3.5퍼센트, 7.9퍼센트 정도다. 언론은 이를 두고 ‘일반고의 몰락’이라고 평가했다.
일반고는 고교 위계 서열표에서 4군을 차지한다. 1~3군이 향유하는 특권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계층 구조상 평범한 노동자계급 자녀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차별적이고 값싼 직업교육과 대중교육의 색깔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1~3군 학교에서 특권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사회 상층계급으로, 4~5군 학교에서 싸구려 직업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하층계급으로 편입되는 구조로 해석할 수 있다. 학교와 학교교육이 학생들을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으로 미리 분화시키면서 사회적 차별을 고착화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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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적인 교육사회학자 보울스와 진티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를 인용해 보자. 보울스와 진티스는 “교육의 조직은 직업의 구조 또는 노동시장의 구조에 대응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직업학교가 “학생들의 운명과 장래 활동이 미리 결정”돼 “사회적 차별을 영속”시킨다고 비판했다.
마이클 애플이 《민주학교》에서 지적한 내용들이 인문교육과 직업교육의 분리에 따른 문제, 직업교육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쟁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애플은 인문교육과 직업교육의 분리가 여러 분야에서 반민주적인 목적에 복무해왔다고 단언했다. 상류 문화의 지식을 일상생활의 지식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하고, 청소년을 육체노동 트랙과 대학에 가고 전문직에 종사할 트랙으로 분리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직업교육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살펴보자. 애플에 따르면 직업교육은 한편으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할 학생들에게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이라는 이중 트랙을 제도화한다. 중・상층 자녀들이 고소득의 전문직을 갖기 위해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준비할 때 저소득층 자녀들은 그들과 구분되어 취업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직업학교 신입생은 학교가 제공하는 금속공예, 목공 등과 같은 다양한 전공 실습실을 순환한다. 교사들은 자신의 실습실이나 교실에서 자율성이라는 명분 속에 고립되어 있다. 학생들에 대한 기대치는 낮고,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수업은 최저 수준이다. 직업학교의 이러한 모습은 백여 년 전에 산업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최초로 시스템이 디자인된 이래로 이제껏 변한 적이 없는데, 이 시스템은 저소득층 출신의 15세 청소년은 반드시 그들이 장래에 무슨 직업에 종사할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비민주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우리 중 누가 15세 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할 거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까?) - 마이클 애플(2015), 《민주학교》, 살림터,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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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중 3 담임을 맡았다. 마이스터고 입시가 시작되는 2학기 초부터 학부모들과 상담을 제법 했다. 많은 부모님들이 이렇게 하소연했다.
“아이가 꿈이 없어서 큰일이에요.”
“우리 아이는 공부에 취미가 없으니 실업계 학교에 보내 취직 준비나 시키려고요.”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이 어떤 생각이 들까. ‘꿈조차 없는 난 뭐지? 부모님 말씀은 ‘답정너’에 불과해. 그런데 그게 맞으면 어떻게 하지?’
이제 아이는 꿈 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부모에게 저당잡힌다. 의존한다. 스스로 내린 선택이나 결정의 실수, 그에 따른 뼈아픈 결과의 책임을 질 때 느낄 수 있는 묵직한 부담감을 경험하지 못한다. ‘애어른’처럼 착하고 얌전하던 아이가 자라 철부지 ‘어른애’가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불안을 스스로 헤쳐나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성숙시키는 살아있는 교육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