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 in 포르투갈
한 도시에 몇주씩 있다 보면 주로 동네탐방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여행인듯 일상인듯 오묘한 시간에 익숙해질 쯤 근교로 "진짜 여행"을 떠난다. 이곳 리스본에는 신트라가 대표적인 근교 여행지이다. 리스본에 들어와 어느 정도 동네 적응기를 보내고 일주일쯤 지나 드디어 신트라행 기차에 올라탔다.
신트라는 리스본에서 기차로 40분쯤 떨어진 작은 소도시이다. 페나성, 신트라 왕궁, 무어성, 헤갈레이아 궁전, 몬세라트 등 중세 포르투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적지가 근거리에 함께 모여있다. 유적지 뿐만 아니라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옛 귀족들의 거주지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우리는 이날 페나성과 헤갈레이아 궁전을 방문하기로 했다. 자세히 보려면 한 곳에 두세시간은 족히 있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은 터라 적게 깊게 보는 우리만의 방식대로 두가지 장소를 수렴했다. 그 중에서도 페나성이 오늘의 메인 코스. 페르난두 2세가 1838년 아내를 위해 만든 산꼭대기에 만든 성이다.
디자인과 색감이 기존의 유럽 성들과는 확연히 달라 그 신기한 매력에 연일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원하는 시간대에 입장이 불가능 할 정도라 우리도 전날 미리 온라인으로 오전 10시 입장권을 구입했다. 이게 다음날 대재앙의 씨앗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10시 입장에 맞춰 리스본 호시우역에서 8시 기차를 타고 8시 40분에 신트라 기차역에 도착했다. 볼트 택시를 타면 10분이면 올라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느긋이 역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아, 그때 그냥 볼트 앱을 켰어야 했다. 아기자기한 신트라 동네가 예뻐서 무심코 구글 지도 앱을 켜고 말았다. 페나성까지 걸어서 딱 50분이었다.
어 이거 해볼만하겠는데. 동네 구경도 할 겸 열심히 걷다 보면 한시간도 안 되서 도착하잖아. 한번 걸어봐?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틀어 동네 골목으로 들어섰다. 햇빛 따사로운 날씨와 목가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동네 분위기에 우리는 연신 걷기를 잘했다고 서로를 칭찬했다. 딱 10분동안은 그랬다.
갑자기 길이 동네 뒤로 연결된 산으로 이어졌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같은 방향인 듯한 노년의 부부가 해맑게 산길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안심하고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산을 에둘러 가는 길이겠거니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눈앞의 높다란 산꼭대기까지 바로 질러가는 코스였다. 우리 부부에게 산이란 아래서 올려다 보면 좋고,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더 좋고, 초입까지 올라가 산공기가 이런 거구나 맛보고 내려와 산채비빔밥 먹으면 최고인지라 이제껏 우리는 산에 한번도 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점점 모양새가 등산이 되고 있었다. 그것도 바위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트리플에이급 악산 말이다(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등산무경험자 입장에서는 지극히 객관적인 의견입니다). 다시 걸어 나가기엔 너무 많이 왔고 앞에는 끝도 없이 오르막만 이어지고 있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많이 쉬면서 천천히 가면 괜찮겠지만 우리는 이미 10시에 페나성 입장 예약을 해둔 상태였다. 구글지도만 믿고 이 길에 들어섰는데 헉헉대며 올라도 도무지 길이 팍팍 줄지 않았다. 이러다가 제때 도착 못하면 티켓값 40유로만 날리는 셈이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 거리를 50분이라고 계산한거야? 구글 지도 제작자는 평지와 산악 구분도 못하나? 네가 한번 걸어봐라. 축지법이라도 쓰라는 거냐? XXXXXXXXXXX
온갖 험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헐떡거리는 숨에 다 묻히고 우리는 그야말로 산을 튀어 올랐다. 초반에 해맑게 산길로 우리를 이끈 부부는 이미 뒤에서 사라져 버렸고 이제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분노의 묵언수행자가 되어 오로지 정상만을 향해 뛰었다.
땀에 옷이 하도 젖어 남편은 난생처음 웃통을 벗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웃겨 나는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겠다고 남편을 뒤좇았다. 누군가 봤다면 미친 동양인 부부가 산속을 뛰어다니고 있다며 신고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해냈다. 평생 처음으로 산 정상을 찍어봤고 50분 구글 산악 경로를 정말 50분만에 주파했다. 비록 페나성 입장 후 다리가 풀려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고 다음날 나는 바닥난 체력 덕에 독감으로 3일동안 죽다 살아났으며 남편은 아직도 웃통 벗은 수치심에 자신을 부정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해냈다.
지금도 우리는 신트라를 신트림으로 기억한다. 페나성도 화려하고 나중에 보았던 헤갈레이아 정원도 아름다웠지만 야수같이 산을 올랐던, 신트림나던 그 기억이 제일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찐한 기억을 남겼다면 된거 아닌가? 그 기억이 추억이 되어 두고두고 꺼내 먹을 재미난 이야기가 되었으니 말이다.